한국 공격진, 일 본 압도하고 있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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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경제 전쟁 이끄는 제품·산업 ‘베스트 11’ 경쟁력 비교
'한국은 일본에 무대의 중앙을 내주기를 거부했다.’ 일본에 이어 한국이 월드컵 16강 진출 티켓을 따내자 한 외신이 전한 말이다. 한국은 월드컵 무대만 일본에 내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세계 비즈니스 무대에서도 한국은 놀라운 기세로 일본을 견제한다. 산업 구조가 비슷한 한국과 일본은 반도체·조선·가전 등 양국의 주력 산업 분야에서 번번이 혈전을 치른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 전쟁’에서 선봉에 서 있는 산업과 제품 가운데 베스트 11을 선정해 양국의 경쟁력을 비교해 보았다.


한국 축구가 흔히 쓰는 전술인 ‘3(수비):4(미드필드):3(공격)’대로 양국 ‘선수’들을 배치하면 골키퍼는 철강, 수비수는 조선·자동차·D램 반도체, 미드필더는 PDP·김치·게임·TFT LCD, 공격수는 에어컨·핸드폰·텔레비전이다.




국가의 기간 산업이자 최후의 보루인 ‘골키퍼’ 실력은 철강산업 전체를 놓고 보면 한국이 일본에 뒤져 있다. 그러나 양국의 대표적인 철강 기업인 포스코와 신일철(新日鐵)만 놓고 보면 한국이 한 수 위이거나 대등하다.
연간 생산량에서는 신일철과 포스코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지만, 돈은 포스코가 훨씬 잘 번다. 포스코의 순이익은 8천1백90억원으로, 신일철은 물론이고 일본의 5대 철강 회사 영업 이익을 전부 합한 수치(6천7백억원)보다 많다. 상대적으로 싼 인건비와 생산 과정 혁신을 통한 원가 경쟁력이 신일철을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력이나 브랜드 가치에서는 포스코가 신일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포스코경영연구소 박현성 박사는 “신일철보다 표면 처리나 고급 제품 개발 능력이 떨어져 고급 시장에서는 신일철이 포스코보다 우세하다”라고 평가했다.


최후방 왼쪽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수는 조선이다. 한국의 조선산업은 1970년대 초대형 도크를 건설하면서 세계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30년 만에 세계 정상의 ‘체력’과 ‘기술’을 가진 최강자로 떠올랐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 회사가 한국의 현대중공업이고, 그 뒤를 잇는 2, 3위 업체도 삼성중공업과 대우조선이다. 일본 최대 조선 회사인 미쓰비시 중공업은 세계 4위에 올라 있다.


D램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홍명보’


한국의 조선은 ‘체력’과 ‘기술’ 모두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최 봉 수석연구원은 “일본의 조선 회사가 조선에만 욕심을 내지 않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는 사이(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한국 기업들은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실력을 연마한 덕이다”라고 말했다.


후방 중앙에서 일본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는 수비수는 D램 반도체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효자 종목이기도 한 D램은 한국 축구의 홍명보 같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세계 D램 시장에서 27%라는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하여 1992년부터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최근 세계 정보기술 분야 최고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선정했다. 일본 기업들의 D램 시장 점유율은 모두 합해도 21%에 불과하다. 한국의 삼성에 비해 일본의 도시바는 점유율 6%대로 세계 6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이 D램 시장에서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체력 다지기’ 전략 덕분이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중반 불황기에도 적극 투자하며 시장 지배력을 강화했다. LG경제연구원 박팔현 연구원은 불황기에 일본 기업들은 사업의 20∼30% 비중에 불과한 반도체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기 어려워 체력 다지기에 소홀했고, 그 결과 대세가 한국 기업 쪽으로 기울었다고 분석했다.


후방 오른쪽에 배치된 ‘선수’는 자동차이다. 수비 선수 가운데 한국의 전력이 가장 떨어지는 곳이 이 분야이다. 생산량으로 볼 때 한국 자동차는 세계 5위이다. 생산 규모에서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과 경쟁하려면 더 분발해야 한다. 수출액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자동차의 체력과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드필더는 일본이 약간 우세


특히 미래 자동차 기술에서 일본은 한국을 크게 앞선다. 한국이 일본 업체의 연료전지나 수소 자동차 같은 에너지 효율화 기술 능력이나 자동 변속기 개발 속도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하지만 엔진·설계·디자인은 격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비슷해졌다. 산업연구원 조 철 박사는 “한국 자동차는 체력만 놓고 보면 일본과 경쟁할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러나 미래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경제전’에서도 축구처럼 미드필드 싸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수를 넘나들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찬스가 왔을 때 날카롭게 어시스트하는 두뇌와 시야가 필요하다. 경제전에 뛰어든 한국 미드필더들의 전체 실력은 일본에 비해 약간 뒤져 있다. 한국 미드필더 가운데 현재 가장 뛰어난 선수는 초박막 액정화면(TFT LCD)이다. 미드필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을 앞지른 선수이기도 하다. 한국은 1995년 이 사업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세계 선두 자리를 빼앗았고, 현재 최대 생산국으로 올라섰다.


LG경제연구원 한수연 연구원은 불황기에 과감히 투자한 것이 일본을 누르는 동력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1997년께 공급 과잉으로 심한 불황을 겪으면서 일본 업체들이 차세대 생산 라인 투자에 소극적일 때 국내 업체들은 한 세대 앞선 양산 설비를 구축했다. 결국 1999년 삼성전자가 19% 점유율로 1위를, LG필립스LCD가 14%로 2위를 차지했다. 그 뒤는 7.9%를 차지한 일본의 히타치가 쫓고 있다. 10년 동안 LCD 시장에서 선두를 지켰던 일본의 샤프는 현재 4위이다.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벽걸이 텔레비전)이 TFT LCD만큼 실력을 키우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지난해는 일본이 세계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한국의 점유율은 6% 미만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연구원은 “일본보다 1년 늦게 시작했지만 한국의 PDP산업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TFT LCD처럼 역전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이 일본보다 다양한 기종을 생산하고, 설비와 소재 및 부품 등 기술 국산화를 8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등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미드필더인 게임·김치의 기량과 체력은 TFT LCD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 수준이다. 게임산업 전체를 놓고 보면 한국은 일본에 한참 뒤져 있다. 일본 게임 시장 규모는 11조원에 이르는데 한국은 이제 겨우 1조원을 넘어섰다. 특히 비디오 게임으로 세계를 제패해온 일본의 위력은 미국도 넘볼 수 없는 정도이다. 그러나 한국에도 ‘한 방’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온라인 게임의 2인자이다. 온라인 게임 시장은 해마다 47% 이상 성장하고 있으므로 희망이 있다. 한국 게임업체들은 비디오 게임 대신 온라인 게임을 들고 일본·중국·동남 아시아 등 세계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김치는 일본이나 한국 모두 비슷한 수준이다. 세계 김치 시장이 아직 열리지 않은 단계여서 한국과 일본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파이 키우기’에 더 힘을 쏟아야 할 형편이다. 김치 시장의 최대 격전지는 일본이다. 이 시장에서 한국 김치의 점유율은 5.9% 정도이다. 하지만 김치 역시 한국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산업으로 클 조짐이 보인다. 농림부 임종길 사무관은 “김치 종주국이라는 후광 효과를 누리며 일본 고급 김치 시장을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김치=고급 김치’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본산보다 20~30%가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업체들조차 ‘한국형 김치’라는 모방 제품을 내놓으며 맞불을 놓을 정도이다.
한·일 경제전의 최전방에는 모두 전자제품이 배치되어 있다. 미드필더 TFT LCD와 PDP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공격진은 세계 최강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 에어컨 시장의 11%를 장악하고 있는 LG전자는 8%를 차지한 일본 마쓰시타를 2년 연속 눌렀다. 1990년대 초부터 에어컨 사업에 집중 투자해온 덕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장 조사를 철저히 해서 현지인들의 문화와 기호에 딱 맞는 에어컨을 개발해 유럽과 중동 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액자형·3면입체냉방 등 에어컨 트렌드를 선도하기도 했다. 반면 마쓰시타를 필두로 한 일본 기업은 신형이 아닌 옛 모델로 안일하게 대응했다. 물론 아직도 일부 기술 면에서는 일본 기업을 앞지르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중앙 공격수(핸드폰) 싸움은 현재 한국의 압승이다. 삼성전자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에 이어 세계 3위 업체인 데 비해 일본의 소니-에릭슨은 5위이다. 시장 점유율도 삼성이 9.65%를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소니-에릭슨은 6.4% 정도이다. 그러나 차세대 이동통신 시장으로 옮겨가면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오디오·비디오 기술과 작고 예쁘게 만드는 손재주가 탁월한 일본이 차세대 이동통신 단말기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미 일본 기업들은 3G 단말기를 중심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핸드폰의 압승과 달리 텔레비전 시장에서는 일본이 약간 우세한 상황이지만, 머지 않아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소니와 삼성이 세계 텔레비전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데, 그 격차는 1%도 채 안된다.
특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브라운관에서 평면으로 텔레비전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삼성이 소니를 누를 절호의 기회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수석연구원은 “아날로그·브라운관 시대에는 세계적인 브랜드 소니의 아성을 뛰어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패러다임이 달라진 현시점에서 소니의 기술력이나 브랜드 네임은 적어도 텔레비전 시장에서는 점점 희석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디지털 텔레비전으로 가면 삼성이 훨씬 유리하다. PDP나 TFT LCD 사업에 손대지 않고 있는 소니에 비해 자체적으로 PDP나 TFT LCD를 공급할 수 있는 삼성이 원가 경쟁력에서 소니를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톱박스 등 후보 선수들의 전쟁도 치열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만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후보 선수들의 경쟁 또한 만만치 않다.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이나 셋톱박스 등 여러 산업의 수많은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일전을 치르는 중이다.
또 차세대 선수를 키워야 다음 월드컵에서 비전을 가질 수 있듯, 한국과 일본은 차세대 투자에서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일본은 로봇공학·나노 기술·생명공학을 차세대 선수로 키우려 하고 있다. 한국 또한 나노와 바이오를 차세대 주력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아직은 아트 수준에 오른 유럽 축구 기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은 나노나 바이오 분야에서 미국이나 유럽에 한 발짝 뒤져 있다. 한국과 일본이 차세대 비즈니스 무대에서 누가 먼저 우위를 점하느냐는 나노와 바이오 산업 육성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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