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천사는 ‘분통’ 환자들은 ‘고통’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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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의사 ‘간호사 성희롱’ 사건 ‘인권 대 진료권’ 충돌로 번져
지난 4월24일 오후 1시 무렵.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 마스크를 쓴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우리에게 의사를 돌려달라”는 환자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한 환자는 “나는 생명이 위독한 암 환자다. 나를 수술한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환자들이 생명의 은인으로 꼽은 인물은 서울대병원 비뇨기과 과장이었던 ㅇ교수. 지난 3월19일 서울대병원이 ㅇ교수의 행태를 문제 삼아 진료를 하지 못하도록 하자, 환자들이 복귀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미 환자 3백44명이 학교측에 탄원서를 낸 터였다. 한 환자는 “다른 의사에게 며칠 전 수술을 받았다. 지금 병실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 오려고 도망 나왔다. 꼭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건은 지난 2월7일로 거슬러올라간다. 서울대병원의 책임 간호사로 일하던 ㄱ씨에 따르면, ㅇ교수는 수술실에서 환자의 환부에 필요한 젤리를 신참 간호사 ㄴ씨가 많이 묻히자 “역시 처녀라 농도를 못 맞춘다”라고 말했다. 함께 수술하던 경력 18년째 고참 간호사 ㄱ씨가 교수의 발언을 제지하자 “그럼 니꺼 발라. 너 많이 나오잖아”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ㄱ씨는 그 말이 질 분비물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 날은 유독 사건이 많았다. 그가 신참 간호사가 업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수술이 끝난 후 장갑도 벗지 않은 채 간호사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이다. 수술시 필요한 장비를 사용할 때 간호사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앉아 거들도록 지시한 것도 시빗거리였다. 이튿날 서울대병원 수술실 간호사 100여 명은 2월15일까지 ㅇ교수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각서를 요구하며 서명 작업에 돌입했다. 정해진 날짜까지 ㅇ교수가 공개 사과를 하지 않자 수술장 간호사들은 노동조합을 찾았고, 노조는 ㅇ교수 관련 사례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ㅇ교수는 여러 차례 ‘빳데루를 주겠다’며 간호사를 등 뒤에서 껴안으려고 했으며, ‘송이버섯’ 발언으로 무안을 주기도 했다. ㄱ씨에 따르면 수술 도중 간호사에게 “송이버섯 먹어 봤느냐”라고 물어보고, “비싸서 못 먹어보고 양송이는 먹어봤다”라고 하자 “내가 줄께” 하며 마취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의 성기를 가리켜서 당황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했다는 것이다(58쪽 인터뷰 참조).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병원측은 지난 2월19일 ㅇ교수의 공개 사과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병원내 폭행과 성희롱 근절 및 ㅇ교수 해임을 위한 대책위 위원장 이향춘씨에 따르면 ㅇ교수는 ‘무릎을 꿇으라면 꿇겠다’고까지 말했지만, 대다수 간호사들은 수습을 위한 형식적인 사과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야, 너’라는 반말 대신 정식 호칭을 불러달라는 간호사들의 요청에 병원 관계자가 ‘업무에서 평등은 있을 수 없다’고 응수한 것도 분노를 부채질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측의 대응은 이례적일 정도로 신속했다. 사건을 정식으로 특별인사위원회에 넘겨 조사한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에 ㅇ교수가 서울대병원에서 진료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겸직 해제 조처를 서울대측에 요청했다(ㅇ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서 병원의 의사 직을 겸직해 왔기 때문이다. 다른 서울대 의대 교수도 마찬가지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폭행이나 성희롱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ㅇ교수의 잘못을 병원측이 시인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울대학교도 병원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지난 3월18일 서울대 정운찬 총장은 병원 노조와의 면담에서 “이미 겸직 해제 결정이 났다. 서울대 차원의 조사도 계속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서울대는 사건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이렇게 사건은 전격적으로 해결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윤리위 결정을 앞두고 ㅇ교수로부터 진료를 받아온 환자들이 대거 탄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탄원서에는 ‘병원은 환자 진료가 최우선이지 권익이나 인권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라는 질책이 담겨 있다. 서울대병원 노조측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졸지에 간호사의 인권과 환자의 진료권이 대립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서울대병원이 ㅇ교수 환자에 대한 진료를 중단한 것은 아니다. 다른 의사들이 후속 진료를 나누어 맡았다. 하지만 환자들은 꼭 ㅇ 교수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인권위에도 ‘진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라’며 진정서를 냈다. 이향춘씨는 “환자들 처지를 이해한다. 환자들에게 진료의 지속성을 보장하려고 병원측과 협의해 왔다. 그렇지만 유능하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덮을 수는 없다”라고 말해 복직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노조에 따르면, 탄원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주소가 유출된 환자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또 탄원에 동참하지 않아 진료에 불이익을 받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환자도 있었다. 이향춘씨는 “환자 정보는 병원이 관리하는 만큼 경위를 병원측에 공식 문의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환자 대표 민 아무개씨는 “환자들끼리 병원에서 만나 상의했고, 서로 알음알음으로 뜻을 모았다”라며 병원 측과의 공조 의혹을 부인했다.

환자들의 항의 방문을 받은 서울대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서울대측은 자신들이 진료를 하라 마라 할 처지가 아니라고 밝혔다. 본부 관계자는 “병원에서 이미 내부 조사를 통해 결론을 내린 것이다. 병원이 요청하면 본부는 수락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윤리위는 교수로서의 품위 유지에 문제가 있었는지 조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윤리위원회의 결정은 서울대병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병원 이사장이 서울대 총장인 것이다. 환자들이 굳이 병원이 아니라 서울대를 찾은 까닭도 이런 정황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사건을 법정 기구인 징계위원회가 아니라 교내 임의 기구인 윤리위원회에 넘긴 것도 사건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리위는 학내 교수 11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정·경고·건의·징계 요청 조처를 내릴 수 있지만 모두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 학교 관계자는 “사실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윤리위 조사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주장이 크게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ㅇ교수는 극도로 긴장하기 마련인 수술실에서 신참 간호사의 업무 미숙 때문에 화가 났다는 점을 강조했고, ㄱ 간호사는 폭행과 성희롱적 발언에 무게를 실었다. ‘젤리 발언’을 놓고서도 ㄱ씨는 당연히 질 분비물이라고 여긴 반면, ㅇ교수는 꼭 그걸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침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것이다. 윤리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인문대 김 아무개 교수는 ㅇ교수 본인이 침이라고 주장했는지에 대해 확인을 거부하면서 “본인들이 어떻게 주장하든, 정황을 헤아려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ㅇ교수가 의사로서 유능했고, 그의 평소 행태를 조사 대상으로 삼기도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례 없이 빠르게 진행되어 온 서울대병원 ㅇ교수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만약 윤리위가 ㅇ교수의 언행이 교수로서의 품위를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진료에서 손을 떼도록 한 병원측의 결정이 경솔한 것이 된다. 복귀 조처를 취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것이다. 만약 윤리위가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해 징계를 요청하는 등 후속 과정이 진행되면 ㅇ교수로부터 진료를 받고 싶다는 환자들의 호소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탄원에 나선 환자들은 이 사건을 전교조와 서교장의 갈등에 비유하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70대 환자 김 아무개씨는 “차 한잔 시켰다고 교장을 그 지경으로 몰고간 것과 간호사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진료를 못하게 하는게 뭐가 다른가. 간호사 한 사람 때문에 환자 수백 명이 고통을 당해서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서울대병원 노조측은 “복직은 있을 수 없으며, 당초 우리가 요구한 대로 교수 직에서도 해임되어야 한다”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서울대병원의 폭행과 인권 무시 사건은 그동안 병원측의 처벌이 미비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윤리위는 지난 4월23일까지 조사를 모두 끝냈다. 윤리위는 비단 그날의 사건뿐 아니라 ㅇ 교수가 비뇨기과 암 전문가로서 다져온 명성과 그를 지지하는 환자들의 신뢰를 감안해야 하는 처지이다. 환자 대표 5인 가운데는 30년 동안 서울대 인문대 교수로 재직했던 원 아무개 교수(현 서울대 명예 교수)도 끼어 있다. 윤리위의 결정은 5월 초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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