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계,호주제 폐지 팔 걷었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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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호주제 위헌 소송 준비중…부계 혈통주의에 선전포고
올 가을은 호적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수난의 계절이 될 듯하다. 혼인 신고서의 호주 난에 부부의 이름을 공동으로 기재하거나, 아예 비워둔 채 서류를 제출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민법에 따르면 관련 기관은 공동 호주, 혹은 무호주 서류를 접수할 수 없다. 이런 도발은 호주제 위헌 소송을 위한 준비이다.

여성단체연합·여성단체협의회·‘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등은 9월중 시민연대를 출범시킨 뒤 ‘호주제 위헌 소송’을 낼 계획이다. 여성단체연합의 호주제폐지운동본부는 지난 7월 한달 동안 호주제로 인한 피해 사례를 70여 건 수집했으며, 이들을 원고인단으로 삼아 소송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변호사와 사법연수생 수십 명이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있어 늦어도 10월 이전에 그 움직임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여성계가 호주제 폐지를 당면 목표로 내건 이유는, 호주제가 가부장 문화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성차별 법이라는 문제 의식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민법 개정안은, 이혼녀 6개월 재혼 금지·동성동본 금혼·친양자 제도 등 그동안 여성계가 개정을 요구해온 조항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호주제 관련 조항은 이번 개정안에서도 제외되었다.

호주제 폐지 운동에 대한 반향은, 유림의 반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난 7월7일 법무부가 주최한 호주제 관련 토론은, 유림의 조직적인 점거와 항의 때문에 파행을 빚었다. 유림 수백 명이 참석해 자료집을 싹쓸이하고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제대로 토론해 보지도 못한 채 한바탕 소동으로 끝이 난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여성연합 이구경숙 정책간사는 “그들이 생각하는 가(家)와 우리가 염두에 두는 가(家)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라고 말했다. ‘호주제를 거부하는 것은 곧 가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그들과 도무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형해화한 호주제를 무엇하러 굳이 바꾸려 드느냐’는 반문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세 차례 민법을 개정하면서 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상속제에서 승계제로 바뀌었고, 호주라는 이유로 누리던 귄리가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호주의 권한은 거가(居家)에 대한 동의권, 직계 존속이나 직계 비속을 입적시키는 권리, 친족회에 관한 권리뿐이다. 이전의 강제 분가권, 귀속 불명 재산의 호주 소유 추정, 거소 지정권, 가족 부양 의무, 가족의 한정치산 금치산 선고에 대한 청구권 및 취소 청구권, 가족의 후견인이 될 권리, 상속분 추가 특권 등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여성계는 아버지의 핏줄만을 보장하는 부계 혈통주의와 그것을 국가가 법적으로 보장하는 호주제가 여성에게 억울한 사연을 낳는 사례가 여전할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 안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양성 평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민법은 호주 승계 순위를 직계비속 남자(아들), 직계비속 여자(딸) 등으로 정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우선 가(家)의 주인이 되도록 하고 있으며(두 살짜리 손자가 할머니의 호주가 될 수 있다), 가족 성원은 누구나 분가해 일가를 창립할 수 있으나 여성은 혼인할 경우 남편의 호적에 입적해야 한다. 한국여성개발원 장영아 연구원은, 호주제의 의미에 대해 “입부혼이 아닌 한 부인의 호적이 남편 호적에 속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제 조항으로서, 출가외인이라는 관념을 문서적으로 확고히 하고 있다. 즉 기혼녀는 호적을 파간 사람, 사회적으로 남편의 가족에 속하는 사람이 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를 법이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수집된 사례를 보아도 현행 민법이 남성의 핏줄을 보호하는 제도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아버지의 자식은, 결혼으로 얻은 자식이건 혼인 외의 자녀이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건 호적에 오르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친부의 인지만 있으면(자기 핏줄이라고 인정하면) 부계 성본을 계승하고 아버지 호적에 오를 수 있다. 남편이 혼인외 아들을 몰래 호적에 올려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식구가 된 아들은 적법한 혼인 관계에서 얻은 딸보다 호주 승계 순위가 앞선다(호적에 새 성원을 입적하는 경우, 호주의 동의를 얻게 되어 있고 대부분 호주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에게는 여러 모로 불편하고 억압적이다. 예를 들어 자녀를 둔 여성이 재혼하는 경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가 모호하다. 법적으로 친권과 양육권을 인정받아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경우에도 동거인으로 표기될 뿐 같은 호적에 오르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재혼한 여성들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아 친권이나 양육권을 인정받은 자녀에게 재혼한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나 성을 바꾸는 것은 재혼 부부가 자녀를 친양자로 들이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것도 자녀가 여섯 살 이상이면 성을 바꾸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엄밀히 말하면 친부의 성(姓)을 따르도록 하는 규정이 바뀌지 않는 한 호주제를 폐지해도 해결할 수 없고 신설된 친양자 제도를 다시 다듬어야 한다).

이른바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해서 호주제로 인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변호인단에 참여한 이석태 변호사는 “주인이 남성으로 못박히는 것 자체가 큰 억압이며 헌법의 양성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라고 말한다. 가족의 대표자가 필요하다면 호주와 가족 성원이라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기준인을 정하는 것으로 족하며, 그 기준인을 정하는 절차가 꼭 호주 승계처럼 성차별적인 위계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 호적, 부부와 자녀만 기록하는 가족별 편제

독일의 최근 판례는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데 얼마나 능동적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독일의 옛 민법은 부모가 합의해 아이의 성을 정하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하고 있었는데 최근 그 조항조차도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았다. 자녀의 성을 정하는 데 남성에게 우월한 지위를 보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한국이 호적법을 만들 때 참고했다는 일본도 그 때의 호적 제도를 일치감치 폐기했다. 김기중 변호사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호적은 이름은 한국과 같지만 내용은 판이하다. 유럽처럼 출생부·혼인부·사망부 등 사건별 편제 방식이 아니고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인적 편성주의이고, 국적을 가진 자에 대해서만 편제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호적과 같지만, 가족 성 아래 부부와 미혼 자녀만으로 호적이 기록되는 가족별 편제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처럼 3세대 이상이 같은 호적에 기록되는 일은 없다.

변호인단 가운데 한 사람인 강금실 변호사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위헌 소송이 승산이 충분하다고 확신한다. 구체적인 가족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양성 평등에도 어긋나는 호주제를 옹호할 합리적인 근거가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1998년부터 호주제 폐지 운동을 펴온 이유명호씨도 “최근 2~3년 사이 일반인의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라며 결과를 낙관했다. 다만 호주제가 부계 혈통주의와 관계가 깊지만 현재 국민 정서에 비출 때 아직까지는 아이가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하는 부계성본주의까지 문제 삼기는 어렵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판단이다.

또 어떤 식으로든 국민 관리 체계가 필요한데 이를 대체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복잡하다는 것도 현실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 이는 호적법뿐 아니라 주민등록제도까지 통합해서 논의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민연대에 참여할 단체들은, 단체 별로 가족별 편제 방식, 1인 1적 제도 등을 놓고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이석태 변호사는 “어차피 대안은 사회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야 한다. 위헌 소송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대안에 대한 여론도 함께 모아갈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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