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개가 올린 과학수사, 갈 길은 까마득
  • 권은중 기자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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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정두영 검거에 공헌…전산화 지지부진ㆍ예산 태부족 '갈 길 요원'
연쇄살인범 정두영 검거에 공헌…전산화 지지부진·예산 태부족 ‘갈 길 요원’

산에서 열 달 사이에 아홉 사람을 죽이고 강도를 16건이나 저지른 정두영은 어떻게 검거되었을까? 정두영 체포는 천안경찰서의 공이었지만 그의 입을 연 것은 과학 수사였다.

그와 똑같이 생긴 몽타주, 범행 현장에 남긴 발자국 크기(260mm)와 다이아몬드형 신발 무늬는 그가 부산 연쇄 살인범이란 것을 말해주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는 분명 과학 수사의 개가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경찰의 과학 수사 인프라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정두영은 4월12일 천안시 원성동에서 주부를 인질로 붙잡고 현금 천만원을 요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천안서는 현상수배 전단 몽타주와 생김새가 비슷하고 신발 크기와 무늬가 일치하는 정두영에게 혐의를 추궁해 부산 서대신동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밝혀냈다.

만약 천안서가 조금만 부주의했다면 정두영은 단순 인질 강도로 구속되어 몇년간 감옥에서 ‘편안하게’ 도피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경우 정이 저지른 수많은 살인 강도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묻히게 된다. 물론 정이 의도적으로 이런 점을 노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곧 해운대 신도시 아파트에 신방을 꾸릴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부산 서부서는 3월부터 몽타주와 수배 전단을 전국에 뿌려 놓았지만 이는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안서가 정이 수배 중인 용의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과학수사계 형사의 유난한 관심 덕택이었다. 천안서 이관우 경장은 과학 수사 요원으로 서울에 있는 경찰청 과학수사과에 자주 출입했다. 이경장은 관내에서 4월 초 발생한 살인 사건 현장에 남겨진 범인 족적을 추적하던 중 부산 서대신동 살인 사건 때도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 서부서에 족적을 의뢰할 정도로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정이 검거되던 날에도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몽타주반과 족적반에서 정두영 이야기를 들었다. 천안으로 돌아온 그는 그날 검거된 정을 보고 부산에서 살인 전과가 있는 데다 얼굴을 본 듯해 서울 본청에 전화해서 부산 서대신동 살인 사건 용의자 몽타주를 받았다. 그는 또 부산 서부서에 전화해 범인이 남긴 족적·크기·신발 종류 등이 검거 당시 정이 신은 신발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정두영은 완강하게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천안서는 부산 서부서 석봉구 경감으로부터 마침 KBS-TV <사건 25시>에서 부산 서대신동 살인 사건을 방영한다는 것을 듣고 정과 함께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천안서 권윤택 경감은 “정이 텔레비전에서 범행 모습이 나올 때 몇차례 고개를 돌리는 데다 족적과 몽타주가 똑같아 범인임을 확신했다”라고 말했다.

천안서는 정의 사진을 폴라로이드로 촬영해 4월13일 새벽 차편으로 부산 서부서에 보냈다. 서대신동 살인 사건 생존자가 사진을 보고 정을 범인이라고 증언해 정두영의 끔찍한 강도 살인 행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동래서도 이 날 정이 소지한 수표 번호를 문의해 온천동 DCM철강 회장 살인 사건의 범인도 정두영임을 밝혀냈다. 동래서는 금고가 털리기는 했어도 잔인하게 70대 노인 3명이 살해된 점을 중시해 원한에 얽힌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정두영의 추가 혐의를 확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관우 경장은 권경감 등 4명과 함께 이무영 경찰청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렇게 전국을 무대로 벌어졌던 살인 강도 사건은 과학수사계 형사의 직업 정신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그가 과학 수사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었고 관련 사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의 여죄가 쉽게 드러났던 것이다. 감식 전문 요원을 키우겠다는 경찰의 의지가 빛을 본 순간이기도 했다.

과학수사과는 지난해 말만 해도 감식과였다. 그러나 경찰은 지난해 말부터 감식(鑑識)이라는 용어가 일제 때 만들어진 것이어서 한국 과학 수사의 척박한 현실을 나타낸다고 보고 감식과라는 이름을 과학수사과로 바꾸고 대대적인 과학수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착수했다. 아예 감식계를 없애버리거나 축소 운영해온 강원·충북·전북·경북·제주 경찰청에 감식계를 재설치하고, 지청과 경찰서 감식요원을 늘렸다.

경찰은 과학 수사를 위해 인원 보강은 물론 장비 선진화와 과학 수사 교육에 계속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범인 검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을 경우 과학수사요원 특진도 약속했다. 개청 이래 지금까지 사복 차림이었던 감식요원에게 유니폼도 새로 입혔다. 경찰은 단순 도난 사건에도 과학수사반을 출동시켜 철저하게 현장을 촬영하고 증거를 채집할 계획이다. 시국 사건이나 강력 사건 수사에만 열심이고 소액 사건에는 무성의하다는 이미지를 씻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두영 사건은 우리 경찰의 과학 수사 수준도 여실히 드러냈다. 천안경찰서는 애초 정을 부산 서대신동 살인 사건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 그가 부산 DCM철강 정회장 집에서 훔친 수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천안경찰서는 이를 도난 수표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이처럼 과학 수사 자료는 각 지방서나 청 단위에 산재해 일선 경찰이 종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또 경찰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전국적인 수사를 하지 않아 종합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부산 서부서 관계자도 “서대신동 등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만 신경 썼지 가까운 동래나 울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신경 쓰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아직도 사건 정보와 수사 진행 상황을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전화하거나 방문해야 한다. 정두영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몽타주를 인편이나 팩스로 받아야 하고, 수사 자료와 사진 등은 직접 방문해야 열람할 수 있다. 정이 가지고 있던 수표를 확인하는 것도 동래서의 요청에 의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만약 도난당한 수표 번호를 통합 전산 시스템을 이용해 천안서에서도 쉽게 조회할 수 있었다면 정의 여죄는 더욱 쉽게 밝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을 무대로 하여 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범죄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경찰이 현재 가동하는 범죄 관련 정보 시스템은 너무나 원시적이다. 현재 일선 경찰서에는 전과 조회기, 범죄수법 영상 전산시스템, 범죄 예측 시스템만이 과학 수사 시스템으로 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범죄 예방과 인력 배치 등을 전산화해 서울청 등에 도입된 컴스탯도 경찰청이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니라 현장을 뛰면서 필요성를 느꼈던 영등포서 안재경 형사과장이 지난해 개발한 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정두영 검거에 공을 세운 곳이 천안경찰서라면, 눈총을 받은 곳은 부산진경찰서이다. 부산진경찰서는 부산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과 관련해 정두영과 전화 통화를 했지만 이상한 점이 없다고 보고했다. 부산진경찰서가 몽타주가 나온 상태에서 정두영을 만나 검거했다면 정이 저지른 다른 살인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이런 비판에 대해 ‘경찰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각 경찰서는 보통 관할 지역 우범자들을 A, B, C 등급으로 나눈다. 조직폭력배·마약사범 등 재범할 여지가 많은 사람들은 A급으로 분류해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동향 파악을 해야 한다. 이 보고는 지역청까지 올라가 지역 단위 범죄 예방 자료로 활용된다.

하지만 외근 업무가 폭주하는 경찰 현실에서 많게는 30~50명이나 되는 A급 우범자를 인권침해 소지 없이 ‘세련되게’ 관리하기는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서울시경 수사부 관계자는 “ 특정 분야 우범자 관리는 하고 있지만 전체 우범자 하나하나를 관리한다는 것은 현재 조직과 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또 경찰청 수사국 한 관계자는 “형을 살고 나온 사람을 전과자라고 해서 경찰이 직접 찾아가는 것은 인권 침해 소지가 분명히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진경찰서의 한 형사도 “보도된 대로 정두영에게 우리가 전화한 것이 아니었다. 형을 만나 전화를 부탁했는데, 나중에 정이 우리에게 전화해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자꾸 찾아 다니냐고 항의했다. 당시에는 그 말을 반박하기 어려웠다”라고 우범자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우범자 관리 자체도 주먹구구식이다. 법무부 교정연수국이 출소자 가운데 죄가 무겁고 재범이 우려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일 경우 입소 당시 주소지 관할 경찰서에 출소를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관할 경찰서는 이 통보를 기초로 우범자 동향을 관할 경찰청에 보고하고 관리한다. 모든 관리는 형사들의 수작업에 의존한다. 따라서 즉각적인 전체 우범자 자료 검색과 조회는 불가능하다. 우범자가 이사를 가면 이전되지 않은 우범자 관리 자료는 무용지물이다. 정두영도 1986년 살인죄로 검거될 당시 주소지인 부산진경찰서에 출소를 통보했지만 출소후 그의 주거지는 해운대구였다.

‘경찰 개혁을 위해 30년을 기다렸다’는 이무영 경찰청장이 취임한 이후 경찰은 한 차원 높은 치안 서비스 제공만이 경찰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며 과학 수사 인프라 구축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올 3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진행되는 경찰개혁방안에 따라 치안 활동의 과학화가 25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경찰종합정보시스템 구축, 범죄예방대책 프로그램(컴스탯) 전국망 확립, 사건수사시스템 전국망 구축, 조직폭력배 영상화 시스템 온라인화, 유전자 지도 데이터베이스화, 감식자료 전산화, 마약류 범죄정보 전산망 구축, 휴대용 전과조회기 도입 등 범죄 수사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별도 예산이 많이 들지 않는 범죄심리분석자문위원회는 이미 발족했다(위 상자 기사 참조).

하지만 올해 경찰 예산 3조6천억원 가운데 이 분야에 책정된 예산은 2백50억원에 불과해 과연 과학 수사 인프라 구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년 대비 5%가 증가한 올해 국방 예산 13조7천억원 가운데 방위력 개선비는 전체 예산의 30%인 4조2천억원에 달한다. 이에 비해 경찰의 예산은 전년 대비 0.038% 증가한 3조6천억원이며 그 중 수사력 개선에 꼭 필요한 과학 수사 비용은 0.06%인 2백50억원에 불과하다.

예산과 인원 문제말고도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각종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통합하는 작업의 어려움과 경찰 인사의 정치 편중도 과학 수사력 강화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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