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는 DJ 정부를 믿지 않는다
  • 權銀重·高在烈 기자 ()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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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층에서 반대 세력으로 선회… 노·정 갈등 증폭
춘투(春鬪) 때와 다른 ‘하투(夏鬪)’의 열기에 정부가 당황하고 있다. 파업을 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롯데호텔노조·사회보험노조·전국금융산업노조(금융노조)·고속철도건설공단·환경관리공단, 또 이들의 상급 단체인 민주노총·한국노총 관계자 모두 한결같이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계속 투쟁 수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폐업했던 의사들도 똑같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의사 못지 않게 노동자도 정부를 지독히 못 믿는다. 공권력이 롯데호텔 노조의 파업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증폭된 이 불신은 급기야 금융대란을 불렀다.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금융노조 대표는 7월10일 밤 10시 정부가 마련한 마지막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예정대로 파업 선포식을 가졌다. 민영화를 앞두고 있는 철도·체신·전력 노조가 동조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어서 정국은 파업으로 소용돌이칠 가능성이 있다.의사 파업·롯데호텔 노조 엇갈린 대처에 분노

노동자들은 지난 6월 의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통령이 해결하라’고 외쳤다. 여야 영수회담과 같은 특단의 조처가 없다면 금융대란은 의료대란처럼 길어질 수도 있다.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가 노동자를 배제한 채 ‘밀어붙이기식 개혁’을 계속 고집한다면 결사 항전을 불사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올 하반기 노·정 갈등의 파고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의료대란이 끝난 6월27일 국무회의에서 “최근 집단 이기주의가 성행해 밀어붙이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불법과 폭력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재해야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고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29일 경찰은 롯데호텔 노조의 파업을 강경 진압했고, 7월1일 사회보험노조 파업도 같은 식으로 제압했다.

시민들은 이런 정부의 행동을 ‘의사는 봐주고 힘 없는 노동자만 잡는다’며 곱지 않은 눈길로 본다. 회사원 김소환씨(32)는 “의사들에게는 질질 끌려 다니다가 생존권을 주장하는 노동자를 진압하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명백한 불법 행위인 의사들 폐업은 봐주고 헌법에 보장된 노조의 파업은 폭력 진압하는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경찰청 관계자마저도 “시위 진압은 정당했지만, 생명을 담보로 폐업한 의사들은 방치하고 노동자 시위는 진압해서 여론이 좋지 않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게다가 롯데호텔 파업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호텔측이 제공한 양주를 마시고 진압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시민들이 정부와 경찰을 바라보는 시선이 험악해지고 있다(22쪽 상자 기사 참조).

하지만 금융대란을 앞두고도 정부의 상황 판단은 지극히 안일했다. 정부는 여전히 개혁의 정당성만을 내세운다. 명분과 실리가 있는 일이므로 반드시 금융 구조 조정을 관철하겠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박준영 공보수석은 7월6일 “개혁하지 않으면 금융산업의 미래는 없다. 은행이 망하면 국가 경제가 위험해진다. 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7월4일 국무회의에서 “과거에 허용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불법적 행동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원론만 되뇌고 있는 사이에 야당은 노동계의 환심을 사느라 바쁘다. 7월6일 한나라당 경제특위는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금융지주회사법안 국회 통과에 반대한다고 밝혀 정부의 뒤통수를 쳤다. 한나라당은 노동관계대책특위(위원장·이부영 의원)를 만들어 롯데호텔·사회보험 노조 강경 진압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정부는 총파업을 선언한 금융노조와는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검찰은 7월8일, 은행노조가 11일부터 집단 휴가에 돌입할 경우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엄격히 적용해 주동자를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헌재 재경부장관은 5일 대한상공회의소 조찬 간담회에서 “양보나 타협으로 금융 구조 조정이 해결되기는 어렵다”라고 말해 노조와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했다.

금융노조도 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융노조 윤태수 홍보위원장은 “지금까지 금융 개혁을 한답시고 뭘 해결했는가. 관치 금융이 존재한 채 은행을 통폐합하면 부실만 커진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노조 상급 단체인 한국노총 이정식 대외협력본부장은 “정부가 총선 전에는 강제적인 금융 구조 조정이 없다고 했다가 지금은 하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이야기한다. 금융감독위원회 이용근 위원장은 ‘감원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가 ‘안 하겠다’고 하는 둥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무슨 대화를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금융노조가, 눈치만 보고 있는 관료가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금융노조 관계자들은 특히 “정부가 1차 금융 구조 조정 때인 1998년 9월 금융 노동자들을 명예퇴직금만 챙기는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인 뒤 4만명을 길거리로 내몰았다”라며 치를 떨고 있다. 한 노조원은 “은행 통합으로 실업자가 된 4만명 중 3만5천명이 다시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예전 월급의 60%만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구조 조정이란 대다수 노동자의 월급을 깎는 조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금융노조는 1차 금융 구조 조정 때처럼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전산요원의 파업 참여도 고려하고 있다. 노조측은 이에 대해 전산실 직원도 조합원인 만큼 전산실을 투쟁의 한 축으로 삼을 생각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도덕적 비난 따위는 의사들처럼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전산실 직원은 파업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단체협약 파기를 선언했다. 전산실 한 조합원에 따르면 전문요원이 파업에 참여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전산망 운영에 타격을 입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금융노조 파업은 국가 금융 시스템이 볼모가 되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파업 정국은 예고된 사태다

노동자와 같은 소외 계층의 지지에 힘입어 지난 대선에서 1.2% 차이로 대통령이 된 DJ에게 노동계가 칼을 들이대는 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DJ는 집권 이후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합법화했고, 지난 5월에는 직접 나서서 노동자들의 요구대로 주5일 근무 수용을 지시하기도 했다. 또 현정부는 그동안 만도기계 파업 때를 제외하고는 파업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예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노동운동 지도부는 DJ와 노동계의 갈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은 “DJ 경제 정책을 이해하면 노동자와 DJ가 얼마나 공생하기 힘든지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바탕을 두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은 애초에 반노동자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그동안 정부와 노동계의 관계는 계속 삐걱댔다. 1998년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기로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낸 노사정위원회도 1년 만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탈퇴하자 활동을 중지했다가 지난해 9월에야 다시 열렸다.

노동계가 노사정위를 ‘있으나마나 한 조직’이라고 폄하하는 이유는 그동안 노사정위가 어떤 민감한 사항도 풀지 못한 채 시간만 끌었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이런 노사정위를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블랙홀이기는, 노사정위뿐이 아니라 금감위·노동부·보건복지부 등 정부의 행정 조직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료들은 대화하려는 성의마저 없었다. 한국노총은 지난해 6월25일 총파업을 하지 않는 대신 금융구조조정특위를 만들어 대책을 논의하기로 정부와 합의했다. 하지만 금감위는 신임 사무관을 보내는 등 시종 무성의로 일관해 한국노총의 분노를 샀고, 민주노총에 비해 순둥이였던 지도부를 ‘강성’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7월1일 새벽 공권력에 강제 진압된 후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사회보험노조도 정부에 속았다는 분위기다. 직장·지역 의료보험공단과 공무원·교원 의보공단이 통합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출범하기 이틀 전인 6월28일부터 임금 인상 등을 주장하며 파업에 돌입한 사회보험노조는, 경영진이 교섭 시간을 끌면서 경찰 진압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노조는 경영진과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을 의심하고 있다(24쪽 상자 기사 참조).

노동계는 최선정 노동부장관과 이용근 금감위 위원장, 김호진 노사정위 위원장이 모두 ‘얼굴 마담‘에 불과하다고 성토한다. 하나같이 정치력이나 장악력이 없는 인물을 노동 행정의 주역으로 발탁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소수 정권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DJ의 인사는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파업해 방송법 개정을 성사시켰던 언론노련 최문순 위원장은 “파업 전후로 정부 채널이 최재승·정동채 의원과 박지원 장관으로 다원화했고 각자 입장도 달랐다.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한을 몰아 주지 않는 DJ식 용인술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런 대립으로 노동계는 물과 기름 관계 같았던 한나라당과도 연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총 고위 관계자는 “지금처럼 정부가 노동계를 무시하면 노동계는 한나라당과 손잡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노동계는 현정권이 재집권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동계가 사안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여 사태를 강경하게 몰고 간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노동부의 한 국장급 간부는 “최근 노동계의 요구는 정치·경제 문제를 포괄하고 있어 대화 자체가 힘들다”라고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선명성 경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라고 말했다. 7월7일 있었던 한국노총 11차 중앙위원회에서는 “민주노총은 5월에 총파업했는데 우리는 뭐하느냐”라며 지도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파업을 선언한 금융노조는 자신들이 집단이기주의자로 몰릴까 봐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시민단체는 경제를 위해 금융 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 데는 일부 동의하지만 1998년 ‘구조 조정=실업’을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말을 아끼고 있다. 한국노총 이정식 본부장은 “정부가 중산층의 이런 이중성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금융 노동자들을 비도덕적으로 몰겠지만,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은 “노동 정책도 국가 경제 정책의 한 축인데 정부가 경제만 회복되면 고용이 안정된다며 노동자의 희생만을 강요한다면 대정부 투쟁은 앞으로 더욱 강경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강수돌 교수(고려대·경영학과)는 “집권 초에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던 정부가 경쟁력과 효율성만 내걸고 노동자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삶의 질이 담보되지 않는 위로부터의 개혁에서 벗어나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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