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의문사’ 유족들의 처절한 투쟁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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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군에서 잃고 소복을 입은 채 전국 각지를 누비는 어머니들이 있다. 이들을 실은 전세 버스 창가에는 살아 생전 늠름했던 젊은이들의 영정이 줄지어 걸려 있고, 바깥에는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구호가 적힌 빛 바랜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벌써 2개월째다. 이 버스는 군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다. 10년 전에, 또는 수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군부대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사망 통지를 받은 이 어머니들에게 이제 군대에서 사망한 병사는 모두 ‘내 자식’이다.

지난 5월10일 소복을 입은 군대 의문사 유족 50여 명이 충북 충주에 있는 공군 ○○부대 정문 앞에 나타났다. 4월24일 중대장 지시로 장병 학술평가 대리 시험을 보다가 적발되어 감찰 조사를 받던 도중 의문사한 이 부대 장승완 상병의 사인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부대측은 서둘러 정문을 폐쇄했다. 장상병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대 철제 정문을 타고 넘어갔고, 이내 정문을 지키던 일단의 무장 군인에 의해 밖으로 밀려나왔다. 부대측과 군대 의문사 유족 사이의 이같은 실랑이는 벌써 1주일째다.

풀리지 않은 군대 의문사 1백20여 건

이틀 뒤 공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며 이 버스가 서울로 올라온 틈을 타서, 이들이 충주의료원에 안치한 채 지키고 있던 장상병의 시신은 공군측에 의해 국군 원주병원으로 옮겨진 뒤 강제 부검 절차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상경 유족들은 버스를 청와대 앞길로 돌렸다. 그러나 종로경찰서 순찰차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버스를 가로 막았다. 소복을 입은 어머니들은 이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같은 시각 천용택 국방부장관은 이화여대에서 개최한 강연회에 초대되어 ‘강군을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역할’을 주제로 특강하고 있었다. 돈을 써서라도 내 자식은 병역을 면제하려고 기를 쓰는 일부 어머니의 잘못된 사고방식이 군대를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올해 5월 국방 당국이 홍역을 치르는 문제는 결국 ‘군대와 어머니’로 압축되는 셈이다. 그러나 일부 어머니의 잘못에 대해 국방 당국은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만 또 다른 어머니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뚜렷이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국방 당국을 국민적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은 군대 의문사(사망 사고) 처리 문제이다.

지난해 12월 판문점 경비 소대장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이 폭발하면서 여론의 눈길을 끌게 된 군대 의문사 문제는 현재 국방 당국이 떠안고 있는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부는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80년대 이후 군대 의문사 사건을 재조사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동안 국방 당국이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지켜본 유족들은 군 당국이 사건 재조사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현재 국방부와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 과정에는 김 훈 중위 사망 사건을 또다시 자살로 몰아붙인 국방 당국의 군사작전식 사건 처리 태도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작용했다. 기존 수사팀의 잘못으로 졸속 처리된 사건을 또다시 군 당국 손에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격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이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고 있는 군대 의문사는 현재 1백20여 건. 한 해 장교와 사병 4백여 명이 군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는데, 그 중에서 군 당국의 자살 발표를 납득하지 못해 유족들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건의 개략적 수치이다.

현재 논란이 되는 군대 의문사 사건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80년대 군사 독재 치하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된 뒤 이른바 녹화사업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 병사들이다. 20여 명에 달하는 강제 징집 희생자들은 사건 직후 유족에게 모두 자살로 통보되었다. 80년대 강제 징집 의문사 유족들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회장 이한열씨 어머니 배은심)로 뭉쳐서 국회 앞에서 2백여 일째 천막 농성 중이다.

다른 한 그룹은 숫적으로 다수를 이루는 군대내 일반 의문사 희생자들이다. 이들 유족은 장교와 사병 가릴 것 없이 ‘전국 군폭력 희생자 유가족 협회’(전군협·회장 이혜숙)로 뭉쳐 진상 규명 활동을 한다. 김 훈 중위 의문사가 공론화하던 시점인 지난해 12월7일 결성된 전군협은 현재 각 군부대를 순회하며 버스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전군협 회원들은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함께 각종 군대 의문사 진상 규명 행사를 갖는가 하면, 주기적으로 국방부 앞에서 소복 시위를 벌임으로써 군대 의문사 문제를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했다.

강제 징집 의문사든 일반 의문사든 이들 유족이 겪는 공통점은 군 당국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고 ‘자살’ 통보를 보낸 뒤 가정이 풍비박산 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고통은 건장한 자식이 군에서 사망했다는 충격에서만 말미암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국가기관인 군부대의 설명을 믿었다가 나중에 확인해 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수두룩하고, 이를 근거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 어김없이 모욕과 멸시와 천대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대한 성역과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84년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가 되어 강제 징집되었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들의 사인을 규명하고자 16년째 상경해 투쟁하는 허영춘씨(63)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 원근이가 스스로 M16 소총 세 발을 쏘아서 자살했다는 것이 군 당국의 통보였다. 처음에는 오른쪽 가슴에 쏘았다가 안 죽으니까 왼쪽 가슴에 다시 쏘아 보고, 그래도 안 죽으니까 머리에 다시 한 발을 쏘아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살이 있다고 강변한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런데 군 당국은 지금도 이 사건을 자살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전남 진도군에서 농사를 짓는 허씨는 이같은 군 당국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서울을 오가며 백방으로 뛰기를 16년째. 현재 유가협 지부장을 맡고 있는 허씨는 아직도 국회 앞에서 2백여 일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기 아들뿐 아니라 강제 징집되었다가 의문사한 다른 20여 학생의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유족과 함께 자연스레 군대 의문사 해결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다. 16년간 생업을 뒷전으로 한 채 아들의 사인을 규명코자 뛰는 허씨의 각오는 단 한 가지이다. 못난 나라에서 나서 억울하게 저 세상으로 간 아들 앞에 못난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진상 규명 요구하다 아들 따라 죽은 어머니

80년대 강제 징집 희생자 유족 가운데는 고통과 한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 끝내 스스로 아들의 뒤를 따라간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강제 징집 직후인 87년 9월 군부대에서 불에 태워진 시신으로 돌아온 최우혁씨의 어머니가 그런 경우이다. 군 당국은 당시 최씨가 분신 자살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수소문한 끝에 그가 이미 사망한 뒤 불에 태워졌음을 시사하는 증거를 여러 군데서 포착했다. 이를 들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그때마다 군 당국은 냉대와 협박으로 대할 뿐이었다.

결국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최씨 어머니는 89년 아들의 뒤를 따라가겠다며 한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을 군에 보내야 한다고 설득하던 군 당국의 주문을 자기가 수용했기 때문에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몰고 온 비극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아들과 아내를 함께 잃은 최봉규씨는 죽는 날까지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각오로 현재 유가협 총무를 맡아 농성을 이끌고 있다.

일반 의문사 유족들이 겪는 고통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들의 자살 통보를 받은 유족들은 대부분 속 시원한 사망 원인이나 알고자 군 당국의 문턱을 넘었다가 가슴에 두 번 못질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한다. 이들은 자연히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 당국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사건을 수소문한다. 그러다가 갈수록 석연치 않은 군부대와 수사기관의 태도 때문에 생업까지 뒷전으로 미룬 채 험난하고 기약 없는 진상 규명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국방부 “자위하다 죽었으니 자살이다” 우겨

현재 전국 각지의 사고 군부대를 버스로 돌며 소복 시위를 벌이는 군대 의문사 유족들은 여러 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합숙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난해 5월12일 안동에 있는 50사단에서 의문사한 육군 박도진 중위(학군 35기)의 어머니는 전군협 소복 시위 현장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학군 동기회 부회장으로 동기생 사이에서도 촉망받던 내 아들이 자위 행위를 하다가 질식해서 사망했고, 사망 원인이 본인 중과실이니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군 당국의 설명이었다. 부대에서는 처음에는 순직으로 처리해 줄 테니 조용히 있어 달라고 했다가 시간이 흐르자 상부에서 거부한다며 유해를 화장해서 가져가라고 통보했다. 부모가 못난 죄로 대한민국의 건장한 장교 아들을 말도 안되는 논리로 두번 죽인 꼴이 되고 보니 내가 밤이면 실성해 거리를 나돌지 않을 수 없었다.”

군 당국의 태도에 속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 뒤늦게 부대 관계자 및 전역자들을 상대로 수소문한 결과 아들이 타살된 후 교묘히 질식사로 위장된 의혹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박중위의 어머니는, 이 사건으로 가정이 풍비박산 났지만 기필코 진상을 규명하고야 말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상 규명에 뛰어든 부모 가운데는 천신만고 끝에 부대측이 감추고 있던 결정적 증거를 잡아내는 경우도 있다. 전군협 회장 이혜숙씨가 그렇다. 이씨는 6사단에서 복무하던 아들 박현우 일병을 지난해 7월20일 잃었다. 부대 안에서 전기에 감전되어 숨진 박일병의 사인에 대해 군부대측은 처음에 자살 또는 본인 중과실에 의한 사고사로 처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씨는 부대를 상대로 3일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여 사건 은폐 기도를 막아내고, 살해범을 잡아냈다(오른쪽 딸린 기사 참조).

지난해 10월12일 외박 공문을 결재하지 않는다 하여 앙심을 품은 부하 하사관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육군 1사단 오정석 중위 아버지 오재균씨도 스스로 뛰어 진상을 밝혀낸 경우이다. 경남 합천에서 식당업을 하던 오씨는 생업을 팽개친 채 5개월 동안 부대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고, 전역자들을 상대로 수소문해 군부대측과 수사기관이 알고서도 숨겼던 살해 현장 목격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시사저널> 제496호 참조).

군 당국의 재조사로는 진상 규명 어려워

그러나 대다수 의문사 사건에서 유족이 발로 뛰어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뚫고 들어가기 만큼 힘들다. 사고가 난 군부대측과 초동에 자살로 결론을 낸 군 수사대의 벽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군 당국이 철저히 외면한 의혹 사항들을 파고들어 타살 의혹을 뒷받침하는 인적·물적 증거를 들이대더라도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최종적인 조사 결과가 뒤집히는 법이 없다.

김 훈 중위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김중위 사건을 다시 자살로 발표한 특조단이 조사 초기에 매달린 작업은 ‘유족측이 혹시 결정적 물증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몇 차례 유족인 김 척 예비역 장군을 만난 특조단은 처음에는 친절하게 증거 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다가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판단될 무렵 단호히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감을 공공연히 표출했다. 그리고 나서 서두른 것은 자살 동기와 징후를 무리하게라도 꿰맞추는 작업이었다. 다행히 김중위 사건은 타살의 결정적 증거로 추정되는 현장 철모의 정체가 뒤늦게 밝혀져 현재 인권단체와 국회가 특조단의 자살몰이 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군대 의문사 문제를 군 당국이 재조사토록 한 현재의 의문사 처리 방식이 계속되는 한 국방 당국을 향하는 한 맺힌 어머니들의 소복 시위 행렬은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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