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수사 앞에 날뛰는 어음 사기단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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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소 시·군에서도 피해자 속출…조직 폭력배까지 개입
서울 구의동에서 15년간 의류제조업체를 운영해온 박승수씨(42)는 어음 사기라는 날벼락을 맞아 하루아침에 사업체와 집을 날린 후, 국가 공권력 불신 상태에 빠져 있다.

남성복을 만들어 도매 시장과 백화점에 납품해 착실히 성장해온 회사가 파산하고 그가 좌절에 빠진 때는 지난해 6월이었다. 박씨는 당시 서울 구의동에서 잘 알고 지내던 한 중소기업 전무로부터 오 ㅇㅇ씨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다. 오씨는 인천에 자동차 부품 총판을 개설하는 데 필요하다며 박씨더러 어음 할인을 부탁했다. 그 역시 백화점 납품 대금으로 받은 어음들을 가끔 소개인에게서 할인 받았던 터라 이 부탁을 들어 주었다. 박씨는 세방전력·연희패션 등의 회사 명의로 발행된 어음들을 여섯 차례에 걸쳐 2억여 원 가량 할인해 주었다. 몇 개는 공증 절차도 거쳤다.

그러던 박씨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6월 28일. 받은 어음이 모두 부도난 것이다. 박씨는 즉각 어음을 준 오씨를 찾았지만 이미 그는 재산을 친인척 명의로 분산하고 잠적한 뒤였다. 뒤늦게야 오씨가 전문 어음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박씨는, 변제를 받기 위해 민사 소송을 내고 공증을 내세워 사기 혐의로 오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오씨가 주소지를 일곱 번이나 옮김에 따라 수도권 일대의 7개 관할 경찰서와 검찰을 쫓아다닌 박씨에게 수사진의 답변은 한결같이 ‘포기하라’는 말뿐이었다. 박씨는 단념하지 않고 직접 범인 체포에 나서 오씨가 있는 곳을 파악한 뒤 인천 지검에 신고했다. 그제서야 수사당국은 겨우 오씨를 기소 중지 처리하더니 곧 풀어주었다.

8개월여를 이렇게 뛰며 재기해 보려고 애태우던 박씨는 결국 지난 1월15일 살던 집까지 가압류당해 월셋방으로 옮겼다. 수사 기관의 수사 기피로 절망했다는 박씨는, 이제 한 가닥 희망을 광주지검에 걸고 있다. 지난해 12월 광주지검 특수부가 대규모 어음사기단을 적발해 사법 처리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현재 파산 상태에서 지하철 공사장에 나가고 있지만, 이 문제만 해결되면 빈손으로라도 일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라며, 광주지검 수사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검거돼도 대부분 무혐의·기소 중지로 풀려나

박씨뿐만 아니라 많은 중소 상공인들이 어음사기단에게 걸려 파산한 뒤 가정이 파괴되고, 물질적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광주지검은 7백억원대 딱지 어음 사기단을, 부산지검은 2천억대 어음 사기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피해자만도 무려 2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이런 어음 사기도 전체 어음사기의 일부일 뿐이라고 본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어음 사기 피해로 고통 받는 선량한 시민들이 속출했지만 사기단은 아무런 제재 없이 도처에서 딱지 어음을 남발하며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사기단 일부를 수사한 광주지검 정윤기 검사에게 서울·부산·대구·대전 등 대도시는 물론, 멀리 속초·양양 등 군소 시·군 단위에서까지 약 3백여 명이 어음 사기 피해를 진정하고 고소장을 보내온 사실은, 그동안 공권력이 이 문제를 얼마나 외면해 왔는지 반증한다.

어음 사기의 출발점에는 유령 회사이다. 사기단은 우선 사업자등록증(법인등록증 포함)을 수십 개 만든 뒤 은행에 거래를 트고 꾸준히 실적을 쌓는다. 모두 유령 회사로서 그 설립은 사체업자 등 브로커들이 돕는다. 즉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금을 하루쯤 대납해 주고 법원에 낼 자본금납입증명서를 떼준 뒤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사람들이다. 사기단은 이런 편법을 써서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이 수십 개 회사도 가질 수 있다. 물론 이때 대표는 부랑인이나 불우 노인 등을 세운다. 어음 발행이나 당좌 개설에 필요한 신용을 쌓는 일에도 사기단은 사채업자의 도움을 받는데, 은행에 수시로 입출금을 대행시키고 수수료를 주는 방식이다.

이처럼 은행에 신용을 쌓은 유령 회사는 사기 범행 날(부도 예정일)을 잡고 딱지 어음을 수백~수천 장씩 발행해 헐값에 처분하는 일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시중에 나온 딱지 어음은 중간 판매책들 손에 들어가(대개 액면가 2천만~3천만원짜리 어음 1장당 2백만~3백만원) 선량한 시민들에게 무차별 피해를 주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공사 대금·자재 대금으로 지급되기도 하고, 사기단이 직접 어음을 이용해 현금화하기 손쉬운 가전제품·컴퓨터 등을 대량 구입한 뒤 덤핑 처리하고 잠적하는 수법이 동원된다.

어음 사기 피해자들에게 더욱 절망스런 현실은 법의 허술함이다. 어음 사기는 민사 사건에 해당해 피해자가 소송을 내도 사기단이 위장된 변제 약속을 하면 그뿐이다. 치밀한 계획 아래 범행을 저지르므로 사기단을 찾아내도 재산을 이미 타인 명의로 빼돌려 형식상 알거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기 혐의를 입증해 형사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수사는 대부분 무혐의 또는 기소 중지로 종결되는 실정이어서 사실상 어음 사기는 법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중소 기업인 어음 불신…신용 사회 와해 위기

최근 어음 사기단의 사기는 더 지능적으로 변했다. 딱지 어음을 한 사람에게 4~5장 이상 건네지 않는다는 철칙이 등장한 것이다. 즉 특정 피해자의 전재산을 집중 공략하기보다는 1인당 1억원 범위에서 다수에게 해를 입히는 전략이다. 이런 수법은 피해자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 사회 여론의 초점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적극적인 자구 노력을 위한 피해자들의 연대 심리마저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같은 신종 어음 사기 피해와 관련해 정윤기 검사는 “이번에 일부 어음 사기단을 수사하자 전국 각지의 면 단위에서까지 ‘나도 그 어음 피해자’라며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최근 어음 사기단 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조직 폭력배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90년대 조직 폭력 집중 단속 이후 건설업체나 고급 술집 등 합법 사업에 널리 진출한 조직 폭력이 어음 사기와 해결사라는 새로운 활동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즉 완력으로 공사를 따낸 뒤 딱지 어음을 주면서 하도급 업체에 헐값으로 공사를 넘기거나 건설 자재를 대량 구입해 파는 것이다. 나중에 부도 처리된 어음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변제를 요구하면 이들은 조직원을 동원해 폭력으로 해결한다.

이런 실정에서 대부분의 어음 사기 피해자들은 어음 사기에 대한 공권력 부재에 절망감을 느끼고 ‘아무리 큰 공사나 납품 제안이 있어도 일단 어음이라면 안 믿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결국 사기단과 조직 폭력배의 무법 천지가 된 어음 사기는 전국 도처에서 선량한 중소 상공인들을 울리며 신용 사회를 무너뜨리는 독버섯으로 계속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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