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판매에도 사기꾼 숨어 있다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7.05.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문 판매 열풍, 1백50여 회사 성업… 일부 업체, 피라미드 사기 수법과 닮은꼴
의사도 교사도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월 천만원 이상이라는 고소득의 꿈 앞에서 전문직이라는 사회적 명예는 무의미하다. 90년대 후반의 화두가 되어 버린 명예 퇴직과 고용 불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 ‘다단계 판매’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최근 소비자 단체와 국내에 진출해 있는 최대 다단계 판매 회사인 (주)한국암웨이가 벌이는 ‘세제 논란’(54쪽 상자 기사 참조)은 이 다단계 논쟁의 신호탄일 뿐이다. 소비자 단체들도 암웨이와의 논쟁보다는 사회의 물신화만 조장한 채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다단계 판매 방식 자체가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몇 년 전 피라미드 사기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다단계 판매 논란이 2회전에 접어든 셈이다.

다단계 판매 시장은, 94년 방문 판매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그간 ‘피라미드’로만 알려져 온 이 방식을 양성화하면서부터 급속하게 확산되어 왔다. 암웨이·누스킨·렉솔 등 외국의 유명한 다단계 판매 회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또 지난해에는 진로 하이리빙·일진 그린피아·풀무원 등 그동안 다단계 시장 진입을 노리던 대기업들이 다수 진출해 다단계 판매 시장은 ‘빅뱅’ 시대를 맞고 있다. 97년 3월 현재 한국방문판매협회에 등록된 회원사만 90개가 넘는다. 회원사로 등록하지 않은 회사까지 합치면 1백50개 정도 된다는 것이 업계의 추정이다.

가입비·교육비 요구, 판매액 할당은 불법

게다가 이번에는 국내 기업도 해외에 다단계 판매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부터 다단계 판매업을 해온 숭민산업이 국내 최초로 인도에 진출한 것이다. 2년 전부터 인도 진출을 준비해 온 숭민산업은 지난 4월17~21일 인도 현지에서 여론 지도층을 포함해 약 천 명을 대상으로 제품 설명회를 열기까지 했다. 숭민산업은 회원 5만명에 올해 수출 목표로 2천만달러를 내세운 국내 최대 다단계 업체이다.

그러나 합법화한 다단계 판매가 늘어가는 만큼 그 부작용도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다단계를 가장한 피라미드식 판매가 그것이다.

지난 4월16일 오후 강남구 삼성동 한 다단계 판매업체 사무실. 자석요·화장품·건강 식품 등을 전시한 전시장 겸 상담 창구에는 신규·기존 회원 백여 명이 회원 가입과 물품 판매 등에 관한 상담을 하느라 북적대고 있었다. 이 건물 2층에 있는 교육장 역시 인파로 넘쳐났다. 백여 명이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 이 회사 사장 이 아무개씨의 비디오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줄만 서 있으면 뒷사람에게 밀려서 4개월이면 MD(회원 확보 숫자에 따라 기존 회원에게 부여되는 직위)가 됩니다. 처음부터 물건을 팔려면 어려우니까 본인이 써버리십시오. 5백20만원어치만 사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3명에게 5백20만원씩만 쓰게 하면 됩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힌’ 마케팅 기법입니다.” 열변을 토하는 이 사장은 한국 다단계 산업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자기 기업이 국내 다단계 산업의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호언하며 “여러분은 애국자요 인격자인데, 외국 기업과 우리 기업 중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하는지 알 것 아닙니까”라고 가입을 권유하기도 했다.
교육을 받은 회원 가입 희망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어렵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 회원 가입을 권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판매 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구 권유로 이 교육에 참가했다는 김수경씨(42·가명)는 “5백20만원어치 물건을 사면 다음 달에는 천만원, 그 다음 달에는 2천만원 하는 식으로 기하 급수로 수익이 보장된다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돈벼락을 맞는 것 아니냐”라며 강의 내용에 대해 의아해 했다. 아울러 김씨는 “교육 담당자들과의 개별 면담에서는 ‘당신이 얼마나 근사하게 사는가를 보여줘야 회원 모집이 쉬울 테니 수익이 생기면 외제차부터 구입하라’는 식으로 소비를 부추기기도 했다”라고 증언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회원 가입을 유도하는 것은 다단계 판매를 가장한 채 피라미드 수법을 사용하는 전형적인 경우이다. 현행 방문 판매 등에 관한 법률은 다단계 회원이나 판매원에게 가입비나 개인 할당 판매액 등 부담을 지게 하는 행위를 일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단계 판매가 1 대 1 접촉을 통한 회원 확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특정한 교육장에 사람을 모아놓고 판매 기법 등을 강의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이 업체 관계자는 이런 강의가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판매원이 되려면 먼저 상품을 사용해 보아 효과를 체험해야만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비싼 제품을 구매하게 하는데, 이것을 구입하지 않으면 사실상 판매원으로 가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피라미드 판매의 전형적 방법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밖에도 다단계 판매와 불법 피라미드 판매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오른쪽 표 참조).

소비자 고발 창구에 접수된 사례를 보더라도 법망을 피해 가는 새로운 피라미드 판매 유형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월 딸이 다단계 판매 회사에 회원으로 가입한 것을 알게 된 신 아무개씨는 곧바로 회사로 찾아가 25만원어치 건강 식품과 1백80만원어치 의류를 반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회사로부터 들은 답변은, 건강 보조 식품은 반품 처리해 줄 수 있으나 의류는 회원에게 맞춰 수선한 것이어서 반품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방문 판매 등에 관한 법률에 보장된 계약 철회권을 원천 봉쇄하는 편법을 사용한 경우이다. 소비자 단체들은 맞춤옷의 경우 철회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점을 악용해 많은 다단계 업체가 맞춤옷을 유행 상품으로 팔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다단계 판매업체 90개를 회원사로 두고 있는 한국방문판매업협회 배기정 전무는 “올해부터 다단계 판매업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하반기부터는 신문에 다단계와 피라미드 판매를 구분하는 요령을 광고하면서 소비자 고발 창구도 개설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위해 책정했다는 예산 5천만원은 사회적 비난을 의식한 ‘면피용’이라는 지적을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다단계 판매업체들의 항변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업체의 피라미드식 판매로 인해 합법적인 다단계 판매 회사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단체와 세제 논쟁을 일으킨 (주)한국암웨이도 잇단 광고전에서 ‘우리는 합법’이라는 사실을 가장 강조했다. 게다가 다단계 판매 회사의 주장에는 분명 매력적인 데가 있다. ‘실제 물건을 사용해 보고 주변에 권할 수 있으니 보증 수표 아니냐’ ‘광고비와 유통 마진을 없앤 판매 기법이어서 일반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품보다 싼값에 좋은 제품을 공급할 수 있다’ ‘방문 판매와 달리 내가 매출을 못 올려도 내 밑의 회원이 매출을 올리면 그 일부가 나의 소득으로 돌아오니 어렵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다단계와 피라미드의 본질은 같다”

그러나 다단계 판매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은 양성화 이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단계 판매에 관한 잡지인 <월간 다이렉트 셀링>이 서울 시민 2백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단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7.5%가 ‘피라미드’라고 답했고 22.5%가 ‘암웨이’라고 대답했다. ‘사기 행각’이나 ‘패가 망신’이라고 대답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더 나아가 시민단체들은 다단계 판매업체들의 주장에 대해 ‘허황된 성공 신화만을 심어주려는 발상’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YMCA 신종원 시민중계실장은 “다단계와 피라미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95년 다단계를 양성화할 당시에는 불법 피라미드 판매를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 부작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 국내외 업체를 막론하고 다단계 판매는 금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국방문판매업협회 배기정 전무도 불법 피라미드 업체는 구속 등 즉각 사법 처리해야 한다면서도,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인식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재 세계 44개국에서 협회가 결성되어 성장 일로에 있는 다단계 판매 시장에서 한국은 황금 시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10월 시드니에서 열린 ‘직접 판매 세계연맹(WFDSA:World Federation of Direct Selling Association)’ 정기총회에서도 참가국들이 한국 시장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 다단계 판매 시장은 이러한 관심에 부응할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이 대회에서 44개국 대표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소비자에 대한 행동 강령’과 국내 다단계 판매의 현실과는 아직도 큰 거리가 있다. 이 강령은 소비자에 대한 설명 의무와 프라이버시 존중 등 15개 항목에 걸쳐 매우 꼼꼼하게 다단계 판매업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무를 준수하는 국내 업체가 거의 없다는 것이 회원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광고비와 유통 마진을 줄여 고품질 제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한다는 다단계 판매의 취지는 이미 훼손되고 있다.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금전 신화’이다. 배금(拜金)을 부추기는 사회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