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가협 10년, 아픔과 승리의 역사
  • 김 당 기자 ()
  • 승인 1995.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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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인권 보듬어온 ‘어머니 부대’ 창립 열돌 맞아… “조직 해체가 우리 목표”
‘그들도 처음엔 평범한 어머니 보통의 아내였다. / 늦게 들어오는 자식을 기다리고 / 자기 일에만 바쁜 남편이 밉던 / 남들과 똑같은 여자였고 어머니였다. 자식이 혹시 / 무슨 물이나 들지 않을까. 조바심 내던 아버지였다. / 적어도 가족들이 고난받는 길을 택하기 전까지는 / 식구 중의 하나가 이 민족의 고통을 끌어안고 / 전생애를 다 던지는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시인 도종환씨가 민가협이라는 약칭이 더 귀에 익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창립 열돌에 부쳐 지은 시 <민가협>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평범한 어머니들이 함께 모여 일가를 이루어 ‘거리의 어머니’로 나선 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민가협은 85년 12월12일 서울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창립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구속자 가족들의 모임은 있었다. 민가협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유신 치하의 구속자가족협의회(74년), 양심범가족협의회(76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구속 가족을 매개로 한 민주화 투쟁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한 민가협은 구속 가족 석방에 주력해온 과거의 가족 모임과는 확실히 달랐다. 민가협의 창립 발기문은 바로 그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한 개인의 석방을 애걸하기보다는 민주화의 대열에 함께 서는 것만이, 고통 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이라고 믿으며, 민중 민주 민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발전적인 가족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발기하는 바이다.’

87년 6월항쟁 통해 널리 알려져

민가협의 조직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담보물 우선주의’이다. 조직 간부는 역시 ‘담보물’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담보물은 구속자이고 안은 감옥이다. 이 원칙에 따라 초대 공동 의장에는 이소선씨(고 전태일의 어머니)·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 등 9명이 맡았고 상근 총무에는 인재근씨(당시 민청련 김근태 의장 부인)가 선임되었다. 지금은 유가족협의회가 따로 독립해 나가 있지만, 당시 이씨는 유가협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박장로와 인씨는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든 남편을 둔 죄로 떠맡은 직분이었다.

민가협의 주요 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우선 긴급 구명 활동을 들 수 있다. 회원들은 예고 없이 발생하는 강제 연행과 밀실에서 자행되는 수사기관의 고문 혐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거침없이 달려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끝이 없는 농성 투쟁이 시작된다. 특히 88년 10월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 유가족을 중심으로 벌인 1백35일 농성 투쟁은 민가협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다. 이처럼 ‘몸을 아끼지 않는 투쟁’은 여전히 민가협의 주무기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민가협도 유엔 인권위원회를 비롯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 아시아워치 같은 국제 인권 기구·단체들과의 정보 교환과 국제 연대 속에서 국제적 압력을 통한 인권 보장에도 힘을 쏟고 있다.

민가협이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로는 87년 6월항쟁을 들 수 있다. 민가협 회원들은 당시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에 항의해 여성단체연합과 연대해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처음 조직적으로 삼베 머리수건을 쓰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자식의 죽음에 항거한 어머니의 분노가 터뜨린 힘이었다. 특히 민가협 어머니들은 그 해 7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장례식 때에 연세대에서 시청까지 꽉 채운 추모 행렬의 맨앞에서 삼베 두건을 쓰고 행렬을 선도했다. 지금은 그 두건이 고난을 상징하는 보랏빛으로 바뀌었지만 그때의 삼베 두건은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보랏빛 두건과 함께 93년 9월부터 시작된 목요집회는 이제 민가협의 고난의 상징이 되었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진행되는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는 민가협이 대중과 정기적으로 만나는 통로이다. 회원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고 말하는 목요집회는 벌써 백회를 훌쩍 넘기고 이제는 종로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목요집회 때마다 회원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지나치는 행인들의 의아스런 눈길과 대화이다. “저 사람들 뭐하는 거지?” “문민 정부인데 아직도 양심수가 있나?”

한 나라의 인권 상황은 일반적으로 양심수의 존재 유무로 가늠한다. 물론 정부 당국의 사전에는 양심수라는 단어가 없다. 국제 무대에서도 정부는 단 1명의 양심수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민가협이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양심수 현황에 따르면, 현재 양심수는 4백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 4백여 명의 양심수를 석방시키기 위해 올해도 민가협은 12월10일에 ‘양심수 석방을 위한 시와 노래의 밤’(102쪽 참조)을 연다. 89년부터 연례 행사로 시작한 이 ‘시와 노래의 밤’은 이제 민가협의 주요한 수익 사업의 하나로 자리잡으리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회원들의 진정한 바람은 이 행사를 더 안해도 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는 것이다. 이 행사의 단골 출연자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고 김남주·문익환 시인이었다. 물론 두 사람 다 민가협의 후원을 받은 양심수였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 다른 양심수들의 석방을 주제로 한 자작시를 낭독하던 두 사람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94년은 민가협의 시련기로 남아 있다. 10년 옥고 끝에 석방된 문목사(민가협 고문)가 열 달도 안돼 세상을 떠났고, 이어 김남주 시인이 뒤를 이음으로써 민가협은 94년 초의 목요집회를 검은 두건과 검은 현수막으로 대신해야 했다. 또 그해 여름에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맞물려 진행된 이른바 신공안정국 때 민가협 어머니들은 “서강대 박 홍 총장의 매카시 선풍과 맞서고 공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전경들한테 맞은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망언 때문에 해를 입을 자식들 생각에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분노의 눈물은 때로는 앞뒤 재지 않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한 지금, 이미 6년 전 영하 13도의 날씨에 전씨를 백담사에서 체포하러 나선 어머니들이었다. 89년에 고문 경관 이근안씨를 감히 현상 수배한 것도 민가협이었다. 현상금이 백만원에서 3백만원으로 올라갔지만 아직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박 홍 총장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도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전국연합의 한 관계자는 “모두 어이가 없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총장실로 달려간 분들도 바로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고 말한다. 민가협은 대개 공권력의 폭력에 맞선 힘없는 어머니들의 ‘자위권 발동’이라고 말하지만, 경찰들로서는 이 어머니 부대만한 공포의 대상도 찾기 힘들다.

민가협이 올해 들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의 석방을 이끌어낸 것이다. 민가협은 ‘김선명 석방 투쟁’을 통해 40여 년간 감춰진 한 장기수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 알려 국제 사회의 눈길을 모으고 마침내 석방을 얻어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를 부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무려 44년 간이나 가두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한국의 인권 현실과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극명하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민가협 남규선 총무와 간사들은 사진 1장 없이, 연고자도 없이 바깥 세상에서 그 무엇하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그의 존재를 마침내 복원해냈고, 앰네스티는 그를 세계 최장기 양심수로 선정했다.

민가협은 현재 구속학생학부모회·장기수가족협의회·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민가협양심수후원회 등 협의체 4개와 사무국을 두고 있다. 이 네 협의체의 회장들이 공동 의장을 맡는데, 현재의 공동의장단은 박용길 장로와 안옥희(5기 전대협 김종식 의장의 어머니)·권오현(양심수후원회장)·윤혜경(장기수협의회장·장기수 장의균씨 부인) 씨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의장단의 ‘담보물’들이 모두 풀려난 해이다. 또 11월30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위반(방북)해 본인 스스로 담보가 된 박용길 장로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85년 12월 처음 민가협을 만들 때만 해도 서슬퍼런 5공 정권은 민가협 간판을 다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담당 경찰관들이 명절 때면 집(민가협) 앞에 설탕이나 초콜릿 같은 선물을 슬쩍 놓고 전화를 할 만큼 ‘힘 있는 단체’로 자생했다. 대개 이쪽에서 고맙다고 들어오라고 하지만 저쪽의 답변은 “아줌마들(민가협 어머니들) 무서워서 못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민가협 10년 역사는 아픔의 역사였지만 승리의 역사였다.” 초대 총무 인재근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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