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해 안기부’ 북한 간첩과 ‘거래’했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J에 연북 혐의 씌우려고 몰래 대남 공작원 불러들여
국가안전기획부의 고전적인 임무는 간첩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기부가 ‘비밀리에 간첩을 정중히 모셨다가 다시 되돌려 보낸’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깜짝 놀랄 일이다. 안기부는 왜 그런 반국가적인 일을 저질렀을까. 오로지 국민회의와 DJ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안기부가 DJ에게 연북(聯北) 혐의를 씌우기 위해 북한의 대남 공작원과 ‘거래’한 것이다.

<시사저널>, 안기부 문건·검찰 수사 통해 확인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비밀 공작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이를테면 대어를 낚기 위해 잔챙이는 잡았다가도 풀어 주거나 미끼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간첩임이 분명해도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는 경우도 있다. 거물급 공작 지도부나 간첩망을 일망 타진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경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어가 적(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라는 데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적과 내통한 일종의 역공작이고 대통령 후보를 대상으로 삼은 명백한 정치 공작이 된다. 이는 검찰이 북풍 사건 수사 결과 발표문에서 밝힌 북풍 사건의 본질과 일맥 상통한다. 검찰은 5월22일 수사 발표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지난 대선 기간 중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정치 공작과 이를 역이용한 안기부의 정치 공작이 결합된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이같은 결론을 입증하는 근거는 많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정치 공작과 이를 역이용한 안기부의 정치 공작이 결합된’ 명백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공개하지 않은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그 단서는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이른바 ‘안기부 제2 비밀 문건’에 담겨 있다.

검찰은 5월22일 북풍 사건 수사 발표에서 〈시사저널〉이 이 문건을 입수한 경위와 문건의 구성 내용 그리고 보도 경위 등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이날 〈시사저널〉 보도 경위에 대해 “3월16일 이 문건을 입수한 〈시사저널〉 기자는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보도하지 않다가 3월18일자 〈한겨레〉 신문에서 보도가 되자, 4월2일자(3월25일 발매호)로 이른바 이대성 파일 이외에 ‘안기부 문건 한 종류 더 있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 바 있고, 5월13일 〈시사저널〉 기자는 소지한 유출 문건(사본)을 검찰에 제출했다”라고 밝혔다.

이대성 전 안기부 203실장(구속중)이 유출한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옛 안기부 2차장(해외 담당) 산하 203실이 작성한 것에 비추어, 이대성 파일과 일부 내용이 겹치는 이 비밀 문건에는 1차장(국내 담당) 산하 103실(대공수사실)이 작성한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검찰은 〈시사저널〉이 제출한 이 비밀 문건을 근거로 “이 문건은 103실과 203실의 보고를 받는 지위에 있는 부장 등 간부가 유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라고 밝혔다. 이는 곧 해외에서 대북 공작 업무를 수행하는 안기부 대북공작실과 국내에 침투한 간첩을 잡는 대공수사실이 DJ의 연북 꼬투리를 잡거나 공작을 꾸미는 데 공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비밀 문건은 안기부가 자체 수집한 ‘허동웅의 대북 연계 첩보’의 근거로 ①97년 7월 흑금성 공작원의 첩보 보고 ②북한 공작원 ○○○의 진술 ③북한 조선류진무역회사 차제홍 사장의 발언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허동웅씨는 96년 8월 당시 조만진 국민회의 조직국장 주선으로 방한한 중국 상무위원장 완리(萬里)의 아들의 통역으로 따라온 조선족 사업가인데, 이를 근거로 권영해 전 안기부장 등 북풍 사건 피고인들은 줄곧 허씨가 북한 ‘국가보위부 망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중 ③은 재미 교포 윤홍준씨(31·구속중)가 자신에게 미사일 판매를 제의했다는 차제홍 사장의 발언(“허동웅이 하는 일은 무역업이 전문이 아니며 특수한 일을 하고 있고 큰 돈은 아니지만 중앙당의 자금을 지원받고 있다”)을 안기부에 전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 안기부 ‘협조자’이던 윤씨가 제보한 내용은 대부분 허위·과장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편 ①의 첩보는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씨(44)의 북한측 파트너였던 국가안전보위부의 한 간부가 한 발언(“국민회의와 연계된 북측 인물은 조선족 허동웅인데 ‘허’를 활용할 계획이었다. ‘허’는 중앙당의 사업으로 국민회의와 연계되어 돈을 물쓰듯 한다”)이다. 박씨는 이와 관련해 “허씨가 ‘북한측과 연계된 인물’이라는 첩보를 안기부에 보고한 적이 있고, 또 허씨가 ‘요주의 인물’이므로 조심하라는 첩보를 국민회의측에 귀띔해 준 적도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 보위부 간부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이는 북한이 허동웅씨를 활용해 국민회의측에 침투하려고 했다는 것이지 국민회의가 ‘그를 연결 고리로 삼아 북한과 커넥션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안기부는 북한과 무역업을 하는 조선족 허동웅씨를 연결 고리로 삼아 국민회의측이 대북 커넥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역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는 바로 안기부가 ‘허동웅의 대북 연계 첩보’의 근거로 제시한 ②의 내용이다. ②는 북한 공작원 ○○○의 진술이라는 점에서 다른 첩보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보고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기술했다(원문에는 실명과 날짜가 기재되어 있으나 공작 사안임을 고려해 이름은 ○로 숫자는 △로 표시한다).
‘베이징 주재 북한 사회문화부 공작원 ○○○(△△세)은 97년 △월 허동웅이 국가안전보위부 망원으로 활동 중인데 DJ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하고 다니며 한국내 많은 사람들과 접촉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97년 △월△△∼△△일간 ○○○을 은밀 입국시켜 신문시 진술)’

여기서 ‘DJ와 함께 찍은 사진’은 허씨가 96년 8월 통역요원으로 한국에 왔을 때 DJ의 일산 자택에서 찍은 기념 사진을 가리킨다.

중요한 사실은 안기부가 북한의 대표적 대남 공작 부서인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을 대선 전에 은밀히 입국시켜 신문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부여 간첩 김동식·울산 부부 간첩 등이 모두 사회문화부가 남파한 공작원들이다. 즉 안기부가 대남 공작원을 비밀리에 입국시켜 허씨를 연결 고리로 한 국민회의-허동웅-북한 커넥션을 신문하고 다시 돌려보낼 만큼 국민회의측의 연북 꼬투리를 잡거나 혐의를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남 공작원, ‘신문’ 후 다시 북으로

바로 그 시점이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밀입북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오씨에 대한 안기부의 ‘기획 입북설’ 또는 ‘묵인 방조설’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비밀 문건에 따르면 안기부는 보름 동안이나 이 대남 공작원을 ‘신문’하고 북한으로 되돌려 보냈다. 문건에서는 ‘신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공작 수행을 위한 일종의 ‘밀봉 교육’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은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지만 안기부에 포섭된 이중 간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검찰은 북풍 사건 수사에서 안기부가 북한의 대남 공작원까지 비밀 입국시켜 공작한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관련 증거로 공개하지는 않은 것이다. 북풍 사건을 수사한 검찰의 한 관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는 다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그 점은 안기부 고유 업무 및 국익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다. 혹시 피고인과 변호인측이 그 문제를 법정에서 거론하면 대응할 수밖에 없지만 검찰이 먼저 그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안기부가 사회문화부 ○○○ 공작원을 비밀리에 입국시켜 ‘허동웅은 국가보위부 망원’이라는 진술을 확보한 직후부터 203실이 본격적으로 허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채증 작업에 나선 것이다. 그 전까지 윤홍준의 첩보에만 의존했던 203실이 정식 인가된 공작도 아닌 이른바 ‘여건 조성 단계의 비인가 공작’에 처장급을 포함해 공작관을 연인원 5명이나 베이징에 출장 보내 40여 일 동안 채증 작업을 벌이게 한 데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월 중순까지 계속된 베이징 현지 채증 작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믿는 구석’이 혹시 ○○○ 공작원을 통한 허씨 유인 공작이나 역공작은 아니었을까.
윤홍준·허동웅 모두 ‘아마추어 망원’

한편 안기부 공작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재중 교포 허동웅은, 재미 교포 윤홍준이 ‘안기부의 협조자’였던 것처럼 ‘국가보위부의 망원’임을 알 수 있다. 망원(網員)은 본디 북한 말로 사전적 의미는 ‘간첩이나 특무 같은 비밀 망에 속해 있는 자’(금성출판사 국어대사전)이다. 그러나 통상 망원이라는 용어는 경찰에서 쓰이는 프락치라는 의미로 통하기도 한다. 또 윤홍준이 김정일과 만났다고 자신을 과시했던 것처럼 허동웅 또한 DJ와 찍은 사진을 자랑하고 다닌 ‘아마추어 망원(협조자)’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재미 교포 윤홍준이 북한과 사업하면서 안기부에 정보를 제공했듯이, 재중 교포 허동웅 또한 한국측과 사업을 도모하면서 보위부에 정보를 제공했을 수 있다. 이같은 ‘양다리 걸치기’는 사실 남북한 양쪽을 상대해 사업하는 해외 교포는 물론 한국 국적 대북 사업가들에게 흔히 있는 ‘생존 방식’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안기부는 간첩을 잡기도 하고 북에 침투시키기도 하지만 보위부는 대남 침투·공작과는 별도로 주로 보안·방첩·대전복 임무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흔히 북한 보위부를 한국의 안기부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알고 있지만, 보위부는 현 안기부의 제2차장실(국내 담당)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보위부와 중앙당이 직접 관리·감독하는 사회문화부 등 대남 공작기관을 합친 것이 안기부에 해당한다(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조직과 역할은 23쪽 표와 같으나 안기부 조직표는 보안상 생략한다).

이처럼 북한은 해외(대남) 공작 기관(사회문화부 등)과 국내 보안 기관(국가안전보위부)을 철저히 분리해 운용하고 있다. 안기부 흑금성 공작원이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도 보위부에 포섭된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문화부에 위장 포섭되었다면 문제가 다르다. 사회문화부는 남파 공작원을 양성해 공작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잡힌 간첩(남파 공작원)이 보위부 소속이라면 이는 ‘정신 나간 사람’이다. 보위부는 공작원을 남파하지 않는다.

결국 안기부 내사 결과에 따르더라도 재중 교포 허동웅은 북한의 대남 공작원(간첩)이 아닌 보위부 망원(협조자)일 뿐인데, 북풍 공작을 주도한 권영해 전 부장 등 옛 안기부 수뇌부가 허씨가 국민회의와 연계 고리를 가진 핵심 공작원인 것처럼 주장하고, 법정에서도 “공개할 수 없는 여러 경로를 통해 허씨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믿을 만한 첩보를 접했다”라고 진술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한 것이다.

검찰이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검찰은 특히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변호인측이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언론에 유출해 일부 월간지(6월호)들이 신문조서를 전재하고 검찰이 허동웅에게 서둘러 면죄부를 준 것처럼 보도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한 수사 검사는 “허동웅이 간첩인지 아닌지는 공소 사실의 본질이 아니고 안기부의 정치 개입이 본질인데 변호인단이 이번 사건을 정치적인 사건으로 몰아 가고 있다. 특히 특정 보수 언론을 통한 언론 플레이를 해 여론 재판으로 몰아 가려 한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간첩 잡는 귀신’인 안기부가 대남 공작원까지 끌어들인 물귀신 작전이 실패로 끝났듯, 허씨를 간첩으로 물고늘어지려는 이번 물귀신 작전 또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