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흔드는 주민을 왜 쏘았는가
  • 광주·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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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송암동 일대 학살 사건 ‘현장 검증’/계엄군, 국교 1년생에 ‘총탄 세례’
5·18 당시 계엄군이 민간인을 수십 명 학살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은 5·18 관련 각종 사료나 88년 국회 청문회, 소문 등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것이 검찰 수사를 통해 최종 ‘확인’된 것이다.

특히 이번 검찰 발표에는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피해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80년 5월23∼24일 주남마을 앞 미니 버스 총격 사건과 송암동 일대 양민 학살 사건이 끼여 있다. 5월21일 시위대에 밀린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 27일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이른바 ‘시민군’이 광주 시내를 지키는 동안 광주 외곽 지역은 이 시기에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주남마을과 송암동 학살 사건을 시간 순으로 따라가 본다.

무차별 사격으로 ‘떼죽음’

△광주 시내 중심부에서 화순 방면으로 차를 몰아 15분쯤 달리다 보면 광주시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이 나온다. 80년 5월23일 오전 10시께 광주∼화순간 국도변에 매복한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5중대원들은 주남마을 못미처 5백m쯤 되는 지점(현재 소태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광주에서 화순 쪽으로 달리던 미니 버스에 집중 사격을 가해 버스에 타고 있던 10여 명을 사살했다. 박현숙양(18·신의여상 3년), 김춘례양(18·일신방직 공원), 백대환군(19·송원전문대 1년) 등 10여 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홍금숙양(17세·춘태여고 1년)과 신원을 알 수 없는 부상자 2명이 생포됐다. 생포된 세 사람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던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려갔다. 그 중 홍금숙양을 제외한 두 사람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작전 지휘관(소령)의 지시에 따라 부대원들에 의해 그곳에서 사살됐다.

△다음날인 5월24일 오후 1시30분 11공수여단 63대대는 주남마을을 출발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외곽 도로를 따라 진월동·송암동에 이르는 동안 이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길가에 있는 집들이 벌집처럼 되고 가축들도 떼죽음을 당했다. 광주시 남구 진월동 원제 부락 앞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방광범군(전남중 1년)도 이 때 사망했다. 광주지검 검시서에 따르면, 방군의 사인은 머리를 관통한 총상이었다.

△원제 부락에서 차로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진제 부락에서는 당시 효덕국교 1학년이던 전재수군이 사망했다. 마을 어귀에서 친구들과 놀던 전군은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다 총알이 날아오자 언덕 위로 도망을 치던 중 신발이 벗겨지자 주워서 다시 돌아선 순간 총을 맞았다.

△원제 부락을 지나 광주∼나주간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를 통과한 63대대는 5월24일 오후 1시55분쯤 효천역 부근에 매복한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았다. 이 사고로 부대원 9명을 잃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은 무장 시위대를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마을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총소리에 놀라 경상전문대(현 광주대) 진입로 부근 하수구에 숨은 박연옥씨(50·여)는 수색하던 공수부대원에게 들켜 그 자리에서 사살당했다.

△박씨를 사살한 직후 공수부대원들은 길 건너 송암동 일성마을에서 가택 수색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권근립씨(25·공원)와 권씨집에 세들어 살던 김승후(18·회사원), 임병철(25·인근 연탄공장 운전사) 씨 등 세 청년이 ‘잠깐 조사할 것이 있다’는 군인들의 말에 따라 나섰다가 집앞에서 곧바로 변을 당했다. 김승후씨는 집에서 스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철로변 공터에서, 나머지 두 사람은 그곳에서 20m쯤 떨어진 신작로 너머 고랑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5·18 광주민중항쟁유족회(5·18 유족회), 5·18 부상자동지회 등 5·18 관련 단체들은 검찰의 이번 발표가 그동안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고 일관되게 발뺌해 온 군 당국의 답변이 허위임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면서도 ‘새롭게 밝혀진 내용이 거의 없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규명이 미흡한 부분도 여러 군데 있다는 지적이다.
첫째, 추가 사망자 문제이다. 주남마을 앞 미니 버스 총격 사건의 경우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는 버스에 모두 18명이 타고 있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검찰은 ‘10여 명’이라고 막연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나마 신원을 확인한 사망자는 7명에 불과하다.

버스 총격 사건 이후 5월27일 공수부대가 마을에서 완전히 철수하기까지 버스가 총격을 받았던 지점 양편의 도랑에 시체 수십 구가 가마니에 덮여 방치돼 있었다는 것이 주남마을 주민 유아무개씨(62·여)의 증언이다. 5·18 당시 시민군이었다는 박대성씨도 지난 7월21일 <전남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80년 5월24∼25일께 유아무개씨가 지적한 지점과 인근 딸기밭에 방치된 시체 21구를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김영진 의원(당시 평민당)이 인용한 11공수여단 공수대원의 수기에는 ‘버스에서 사살된 사람들을 길가 바위 옆에 가매장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아무개씨나 박대성씨가 말하는 방치된 시신은 또 누구의 것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학살 명령한 지휘관은 누구인가

둘째, 오인 사격인지 고의 사격인지를 밝혀야 한다. 권근립씨 등이 사망한 송암동 일성마을 사건에서는 분명한 고의성이 입증됐지만, 주남마을 사건의 경우 검찰은 ‘미니 버스가 매복한 군의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 총격이 가해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홍금숙씨는 “정지하라는 소리를 듣고 바로 차를 세웠다. 차안에 있던 사람들의 항복 표시가 군인들에게 분명히 보였을 텐데도 사격이 계속됐다”고 주장한다. 여덟 군데나 총상을 입은 전재수군 또한 유탄에 맞았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5·18 유족회측 주장이다.

셋째, 작전 지휘관이 누구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홍금숙씨와 함께 있었던 부상자 2명을 처치하도록 명령한 소령의 신원을 정확히 밝혀내야만 한다는 것이 5·18 관련 단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전쟁 중 적군의 병사라 할지라도 포로가 되어 비무장일 때는 절대로 그 사람에 대해 불이익을 가할 수 없다’는 제네바 협정의 정신에 비추어 관련자를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국회 청문회에서 주남마을 주민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던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을 ‘위증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검찰 수사가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자 일각에서는 ‘검찰이 5·18 불기소 처분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미리 예상하고 여론 무마용으로 민간인 학살 내용을 몇 개 끼워넣은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유가족 중 이번 수사와 관련해 검찰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은 사람은 1명도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 5·18 유족회 정수만 회장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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