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 풀린 문화재, 날고 뛰는 유물 도둑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3.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법, 갈수록 대담·교활…수사력 보강·처벌 강화 '발등의 불'

지난해 9월 경기도 용인시 ㅎ박물관 폐쇄회로 카메라에 수상한 관람객 한 사람이 잡혔다. 등산 모자를 눌러쓴 이 관람객은 전시장 내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유리 진열관에 가깝게 다가섰다. 그 는 예리한 칼을 꺼내더니 실리콘으로 처리한 진열관 접착 부분을 순식간에 오려내고, 그 안에 전시되어 있던 경전 몇 점을 자기 옷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가 진열관을 원래대로 덮고 전시장을 나서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ㅎ박물관은 뒤늦게 도난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사설 박물관 중에서도 최첨단 보안 시설을 자랑한다는 ㅎ박물관이었지만 대낮에, 경비원이 4명이나 상주하는 공간에서 절도 행위가 벌어진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찰은 밤 시간보다 일반 관람 시간에 경비가 오히려 허술할 수 있다는 허점을 범인이 노렸다고 분석했다. 진열관 유리가 깨지면 경보기가 자동으로 울린다는 점을 이용해 유리를 깨는 대신 접착면을 절단한 것도 범인이 보여준 지능적인 면모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2월14일 서울 서초경찰서는 문화재 전문 절도·밀거래단 8명을 검거하고, 달아난 공범 3명을 수배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전국의 박물관과 사찰을 돌아다니며 문화재를 훔치고 이를 밀거래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 중 나이가 가장 젊지만 전과는 가장 화려한(문화재보호법 위반 등 전과 11범) 문화재 전문'꾼' 서 아무개씨(39)를 ㅎ박물관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서씨가 유통시킨 장물 가운데 ㅎ박물관 도난 물품이 들어 있는 데다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범인의 인상 착의가 서씨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장물아비' 40년 경력자 포함, 밀거래단 일망타진


서씨와 그 일당을 잡기 위해 경찰이 기획 수사에 착수한 것은 1월 초. 지난해 9월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도난된 경전 몇 점이 시중에 매물로 나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문화재청 사범 단속반에 지원을 요청했다(대흥사 도난 사건 또한 수법이 ㅎ박물관과 거의 유사했다) . 사범 단속반은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에 딸린, 직원이 2명뿐인 초미니 기구. 수사권은 없지만 도난당한 문화재의 유통 경로를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곳에서 경력 20년인 베테랑 민간 수사관 강신재씨(53)가 파견되었다. 강씨는 먼저 안면 있는 인사동 상인들에게 '덫'을 놓았다.

1주일 뒤, '골동품 수집상 박 아무개씨가 미심쩍은 물건을 들고 왔더라'는 상인의 귀띔을 받고 원매자로 가장해 박씨(46)를 만난 강씨는, 그가 내민 물건이 대흥사에서 없어진 <금니묘법연화경>임을 직감했다. 신분을 밝히고 매입 경로를 추궁하자 상대는 펄쩍 뛰었다. 유사 물품일 뿐 대흥사 것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강씨는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문화재 도난 목록 및 사진을 꺼냈다. 대흥사 도난품 사진에는 경전의 오른쪽 윗부분 한귀퉁이가 세월에 삭아 떨어져 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더 오리발을 내밀 수 없게 된 박씨는 자기에게 물건을 판 또 다른 알선책을 털어놓았다. 알선책의 집을 덮친 강씨와 경찰은 이곳에서 베개 속에 켜켜이 감추어 둔 <대방광불화엄경> 7권을 찾아냈다. 대흥사에서 사라진 경전은 <금니묘법연화경>과 <대방광불화엄경>. 그런데 본문만 남아 있는 <금니묘법연화경>과 달리 표지가 화려해 금방 표시가 나는 <대방광불화엄경>은 곧바로 시중에 유통시키기 어려워 비밀 장소에 숨겨 두었던 셈이었다.

이렇게 차례로 알선 경로를 추적하다 보니 서울·의정부·대전·영주·상주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밀거래단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 핵심에는 절도범 서씨와 문화재 밀거래 경력만 40년이 넘은 '장물아비' 정 아무개씨(62)가 있었다. 일반 절도범 출신인 서씨는 1990년대 중반 정씨를 만나고부터 문화재의 '부가 가치'에 눈을 뜬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서씨가 ㅎ박물관에서 훔쳐온 <사경>을 조 아무개씨(55)에게 3천만원에 팔도록 알선하면서 사례금 명목으로 2백만원을 챙기는 등 시가 100억 원 상당의 유물 30여 점을 밀거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소시효 지날 때까지 은닉, 일본에 넘겨


정씨를 거쳐 장물을 사들인 사람 중에는 수십억대 자산가도 끼어 있었다. 이들 '고급 브로커'는 공소 시효(지정 문화재 7년, 비지정 문화재 5년)가 지날 때까지 장물을 은닉해 두었다가 구입가보다 2∼3배 높은 가격에 되팔곤 한다는 것이 강신재씨의 지적이다. 매매 상대는 주로 일본인. 고(古) 문헌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일본인이 널려 있다는 것이 브로커 정씨의 말이다. 어떤 장물은 고위 공직자나 재벌가에도 은밀히 팔려 나간다고 한다.

이번에 검거된 밀거래단은 2002년 개장을 앞둔 서울시립박물관에까지 천만 원을 받고 장물을 팔아 충격을 주었다. 이인좌·정희량의 난을 평정한 김중만의 공을 기려 1728년 영조가 하사했다는 '문무공신 이등 공신록'이 그것이다. 서울시립박물관은 유물 매입 공고를 내고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유물위원회를 열어 구입 여부를 결정하는 등 공식 절차를 거친 데다, 이 물건이 문화재청의 문화재 도난 목록에 올라 있지 않아 장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문화재 사범은 날로 대담·교활해지고 있는데 이를 수사할 인력은 예나 지금이나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이 서초경찰서 강력반장 조상복 경위의 지적이다. 특히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에 비해 관리가 소홀하게 마련인 비지정 문화재는 전문 절도단의 '밥'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해남 대흥사는 7년 전에도 비지정 문화재인 <부모은중경>을 도난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지정 문화재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민족의 정신과 유산을 팔아먹는 행위인 문화재 관련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관리 강화·수사 인력 확충과 더불어 문화재 사범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모호한 현행 법 또한 하루빨리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 박상준 연구원의 지적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