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덜난 공보험, 사보험으로 메우자?"
  • 권은중 기자 (jungk@e-sisa.co.kr)
  • 승인 2001.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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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의료저축제도 제안에 시민단체 반발…
"국민 주머니털기일 뿐"


의료보험을 둘러싼 사상 투쟁이 뜨겁다. 지난해 일부 의사들은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료 대란을 사상 투쟁이라고 명명했다. 즉 국가 주도 의료 체계를 만들려는 의약분업 추종자들과 국가 통제를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의사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사상 투쟁은 민간보험 논쟁으로 바뀌어 진행되고 있다.




의약분업 당시 일부 의사들은 의약분업보다 시급한 것이 의료보험 재정 문제라며 지금처럼 저부담-저급여 체계로 의료보험을 운영할 바에야 적정부담-적정혜택을 보장하는 민간 보험을 도입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자영업자로서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던 의사들이 의약분업으로 소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국가 통제를 받게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따라서 폐업 당시 의사들의 대정부 투쟁 수위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이와 반대로 의약분업 찬성론자들은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보험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의료 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논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민간 보험 논의는 시기 상조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총의료비의 27%만을 부담하고 있는 공보험을 더욱 강화하고 공공 의료기관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 의약분업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먼저 포문을 열고 나섰다.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보 재정 적자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3월26일, 전경련은 '가입자와 국가가 부담 가능한 수준에서 보험 기능과 사회보장 기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의료저축제도(MSA)와 민간 보험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라고 직격탄을 쏘았다. 전경련은 4월9일 건강보험 개혁 방안에 관한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전경련은 의약분업이 막 시작되었던 지난해 11월에도 비슷한 내용을 주장했었다.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박했다. 건강연대는 의료보험이 사회보장제도로서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국민의 책임과 도덕적 해이만을 강조하는 전경련 주장은 시대 착오라고 비판했다.


"소액 진료 자기 부담, 난치병 치료는 큰 혜택"




의료저축제도는 현재 싱가포르와 미국의 일부 주에서 시행 중이다. 이 제도는 감기 등 가벼운 질병은 자신과 가족의 의료저축예금으로 해결하고, 암과 같이 비용이 많이 드는 질병은 국가의료보험으로 처리한다. 남는 돈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다. 한마디로 소액 진료자는 자기 돈으로 치료받고, 치료비가 많이 드는 난치병 환자들은 보험 혜택을 듬뿍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아프면 무조건 병원으로 가는 이용자의 도덕적 해이를 막고 보험 재정 건전화를 꾀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것이 전경련 주장이다.


보건복지부도 이 안에 일단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올해 2월1일 최선정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할 때 장기적으로 의료저축제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최장관은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언론은 이 제도가 의보 재정 위기를 막으려는 복지부의 꼼수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복지부가 의료보험을 거덜 내고 재벌에게 손을 내민다고 비판했다.


보건복지부는 몇 년 전부터 의료보험의 한 방편으로 의료저축제도를 검토해 왔다고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보 재정 문제만 아니었다면 의료저축제도는 대안이 될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중국 일부 성이 MSA를 도입했는데 의료 비용이 34% 줄었다. 안정적인 복지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이 제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비용과 효율 면에서 정부와 기업이 이 제도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복지 비용 부담은 개인에게, 기업은 자금 운용




전경련은 현재 민간 보험보다는 의료저축제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암보험 같은 질병 보험은 특정 질병만 보상하며, 공공 보험처럼 병원과 직거래는 안된다. 민간 보험이 공공 보험의 영역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시장을 개척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삼성생명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서도 건강 보험 상품은 적자 폭이 큰 데다 우리나라 보험급여 체계에는 맞지 않아 업계가 관련 상품 개발을 주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경련이 주장하는 대로 의료저축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은 보험 비용 지출을 줄일 수 있고, 기업이 직접 복지 재정 운영에도 참여할 수 있다. 지금처럼 돈만 내지 않아도 된다. 그만큼 기업으로서는 유리하다. 기업이 관리하기 때문에 운용의 효율성도 보장된다.


그러나 민간 기업이 기금을 운영하겠다는 전경련 주장은 국가가 운영하는 싱가포르의 제도와는 다르다. 울산대 강영호 교수는 "기업에 부담이 되는 사회보험제도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또 그 기금을 기업이 직접 관리한다는 것이 전경련이 생각하는 MSA의 골자다"라고 꼬집었다. 전경련 주장대로 된다면 기업은 복지 비용을 줄이고 새로운 자금원을 운용하는 일석이조의 기회를 잡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전경련이 제시한 민간 기업이 운영한다는 방안 등은 모두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의사협회는 이 제도에 대해 일단 침묵하고 있다. 내부의 입장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 김방철 보험이사는 "논의가 진행 중이어서 말할 단계가 아니다. 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의료저축제도가 도입되면 암 같은 중병을 치료할 수 있는 대형 병원이 상대적으로 혜택을 많이 받고, 소액 진료 위주의 개원 의사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의사들은 이 제도가 도입되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 제도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싱가포르가 정부 주도의 국가의료서비스체계(NHS)를 보완하기 위해 의료저축제도를 고안했다는 점을 전경련과 정부가 간과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정책국장은 "싱가포르 병원 70% 이상이 국영이다. 1984년 싱가포르가 이 제도를 도입한 상황과 우리의 상황은 다르다"라고 지적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공짜로 병원을 이용하는 소비자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여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의료저축제도를 고안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보험 재정 파탄의 가장 큰 원인이 의료 공급자에게 있다. 즉 병원과 약국의 도덕적 해이를 막는 데 무엇보다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데, 거꾸로 소비자들이 병원을 자주 찾아 의보 재정이 파탄 났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의료저축제도가 도입되는 순간부터 공보험의 위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민주당 김성순 의원은 "이미 의보 재정이 파탄 나고 보험에 들어가는 돈에 비해 보장은 적다는 비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이 제도가 도입되면 공보험 탈퇴 움직임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지적한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의료저축제도의 본질은 결국 정부와 의사의 부담을 줄이고 국민 주머니에서 다시 돈을 꺼내려는 것이다. 일단 돈의 누수를 최대한 막아 의보 재정을 건실화하려는 방안을 왜 외면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보 재정 파탄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의보 재정 건실화 방안의 하나로 의료저축제도 도입이 검토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야당 내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그 시기가 조절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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