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서울 '벌떼 공습 주의보'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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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나타나 소방서 '진땀'…

양봉 농가 '벌통 관리 소홀'이 주 요인


지난 5월20일 오후 김포발 제주행 아시아나 항공기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벌떼 수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한국공항공단 소방대가 살수차로 물을 뿌려 벌떼를 간신히 쫓아냈다. 다행히 승객이 탑승하기 전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벌떼 소동은 항공사 직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시아나 항공측은 벌떼 소동이 창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벌떼 소동은 이제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는 5월 중순이 되면 곳곳에서 벌떼가 출몰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23일 오전 서대문구 홍제1동에 사는 김광숙씨(43)는 마당에 나갔다가 아연 실색했다. 대추나무 가지에 수박만한 크기의 벌떼가 매달려 있고 벌 수백 마리가 마당에서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5m 높이 대추나무 가지에 매달린 벌떼의 크기는 너비 25cm 높이 45cm였다.


같은 날 김씨의 집 근처인 홍제3동에 사는 이호연씨(61) 집 마당에도 벌떼가 날아들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이씨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벌떼를 감나무에서 발견하고 놀라 소방서에 신고했다. 이씨 집에 나타난 벌은 토종벌이어서 소방관들이 처리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소방관들은 꿀을 바른 통을 가까이에 대고 벌이 들어오도록 유도해서 벌떼를 처리한다. 여왕벌이 통 속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벌이 따라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여왕벌을 찾지 못하면 벌떼 진압이 어려워진다. 이때에는 살충제를 이용한 화학전, 불을 이용한 화공전, 물을 이용한 수공전 등 갖가지 방법이 총동원된다.


서울 서부소방서 정갑수 구조대장은 "해마다 5월이면 하루에 두세 번씩 벌떼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이때에는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일 다음으로 벌떼 소탕이 잦다"라고 말했다. 아카시나무 꽃이 만발하는 5월 중순이면 산과 인접한 서울시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 성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 서울 북부지역과 강남구 서초구 동작구 등 서울 남부지역 소방서는 벌떼와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다.




도시 습격 사건 : 벌떼가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 자주 출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양봉 농가가 경제적인 이유로 인공 분봉 등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소방서 집계에 따르면 1998년 이후 서울에서만 매년 벌떼가 3백 회 이상 나타나 소방관이 출동했다. 경상남도 소방본부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999년 동물과 관련한 구조 활동 5백55건 중에 벌떼 출현으로 인한 출동이 3백26건이었다. 이는 전체의 59%에 달하는 비율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출동 이유였다.


도심에 이처럼 자주 벌떼가 출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때 이른 더위에 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벌떼가 도심에 날아드는 이유는 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벌떼가 도심에 날아들도록 만든 것은 바로 사람의 욕심과 부주의이다.


도심에 출몰하는 것은 말벌이나 땅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이 꿀벌이다. 인근에 꿀벌을 키우는 양봉 농가가 있기 때문이다. 홍제동에 벌떼가 자주 나타난 것도 인근 안산에 벌을 치는 양봉 농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림부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는 벌을 치는 양봉 농가가 약 100 가구 정도 있다(1999년 기준. 부산 50가구 대구 2백2가구 인천 94가구 광주 1백91가구 대전 1백12가구 울산 4백26가구). 이들 양봉 농가는 서울 안팎에서 벌을 1만 5천군(1군은 벌 한 통) 가량 키우고 있다.


서울은 아카시나무 꽃을 따라 북상하는 이동 양봉 농가가 주로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5월이면 북한산 도봉산 삼각산 안산 우면산 중턱에서 천막을 쳐놓고 벌을 키우는 양봉 농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카시나무 많은 서울에 양봉 농가 100가구




서울이 양봉 농가에게 인기가 좋은 것은 바로 서울 주변 산에 아카시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아카시 꿀은 빛깔이 맑고 향기가 좋으며 매우 달아 꿀 중에서 인기가 좋다. 벌꿀의 70% 이상이 바로 아카시 꿀이다. 외래종인 아카시나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사방 공사를 하면서 서울 인근 산에 많이 심어졌다.


아카시 꿀을 따기 위해 서울 인근에서 벌을 치는 양봉 농가가 벌통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서울 도심에서 벌떼 소동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벌떼가 도심으로 날아드는 것은 개체 수가 갑자기 증가해 벌통 안에 공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월동 직후 벌통 한 통에 사는 벌의 수는 대략 6천∼8천 마리이다. 그런데 아카시꽃이 본격적으로 피는 5월에는 벌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해서 약 3만 마리 정도로 불어난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여왕벌도 생기는데, 양봉 농가는 이때 벌통을 나누는 인공 분봉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분봉이 일어나서 절반 정도의 벌이 예전의 여왕벌과 함께 벌통을 빠져나가 버린다.


그런데 분봉해야 하는 시기는 한창 꿀을 따는 시기이다. 꿀을 따는 데만도 인력이 모자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자연 분봉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부업으로 벌을 키우는 아마추어 양봉 농가의 경우 벌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해 분봉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분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단순한 관리 소홀만은 아니다. 양봉 농가가 분봉을 제대로 하지 않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크다. 분봉을 하면 벌들이 새로 옮긴 벌통에 벌집을 만드는 데 보통 2∼3일에서 1주일 정도가 걸린다. 이 기간은 벌들이 꿀을 가장 많이 따오는 시기인데, 이때 꿀을 따지 못하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양봉 농가는 일부러 분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미 있는 벌로 최대한 꿀을 많이 짜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또 벌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계산속도 양봉 농가가 분봉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벌통을 늘리면 시설비·유지비 등 비용과 품이 더 들어간다. 경기가 좋지 않은 요즘은 벌통을 늘리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기호품인 벌꿀 소비가 줄었기 때문이다.


판로 개척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양봉 농가들은 벌통 수를 늘리려 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늘린 벌통이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IMF 이후 분봉을 하는 양봉 농가가 거의 없어졌다. 최근 3∼4년 동안 집중적으로 벌떼 소동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양봉 농가로부터 버림받은 벌들은 산을 넘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도심으로 내려온다. 특히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벌떼가 자주 나타난다. 시민환경연구소 박태순 연구원은 "분봉한 벌들은 숲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영역 싸움에서 져서 산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도심의 화단에 있는 꽃에서 그나마 먹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바람 불거나 날 흐리면 인명 피해 날 수도




이처럼 벌떼로 인한 소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양봉 농가는 버림받은 벌들이 어디로 갔는지 너무나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서 벌을 치는 조 아무개씨(41)는 "매일 한두 통씩 자연 분봉이 일어난다. 하지만 벌들은 산 어딘가에 정착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심으로 내려온 벌들의 운명은 비참하다. 소방관에게 걸리면 대부분 죽는다. 소방관은 벌을 '구조'하는 것이 아니라 '퇴치'하기 때문이다. 벌떼 퇴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방서에 벌떼 구조 장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도심 벌떼 출현은 안전불감증이 낳은 전형적인 '한국형 재난'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을 더 얻기 위해 버린 벌들이 도심을 떠돌면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벌과 푹푹 찌는 날씨에 사투를 벌여야 하는 소방관들에게 벌떼와의 전쟁은 곤욕이다.


벌은 보통 때는 온순하다. 건드리지 않으면 쏘지 않는다. 하지만 날씨가 흐리고 비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벌은 주위에 있는 사람과 동물을 무조건 쏘는 습성이 있다. 버림받은 벌로부터 공격을 당해 인명 피해가 날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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