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교양 서적도 이적표현물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7.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 목록 단독 입수/

〈해방전후사의 인식〉등 '고전' 포함…판·검사가 처벌 여부 판단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한다." 정 아무개씨(22)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경찰청 소속 보안수사대가 미란다 원칙을 말하는데도 정씨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난 5월14일 오전 7시30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자택에서 정씨는 경찰청 소속 보안수사대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보안수사대 형사 6명은 정씨를 체포하고, 컴퓨터·디스켓·책 등 스물세 가지 물품을 압수했다.




무죄와 유죄 사이 : <한국사회의 이해>를 쓴 정진상·장상환 교수는 6년 간의 법정 공방 끝에 이적표현물을 제작·배포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오른쪽). 그러나 한총련 소속 대학생(맨 오른쪽) 대부분은 여전히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체포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단국대학교 총학생회 연대사업국장인 정씨는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정씨를 '단국대 활동가 조직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단국대 학생 8명과 함께 체포했다.


그런데 검찰은 정씨를 기소하면서 이적단체 구성이나 가입 혐의는 쏙 빼고, 국가보안법 7조 5항에 해당하는 이적표현물 소지만으로 기소했다. 체포 당시 사유와 기소할 때 사유가 달랐다. 검찰과 경찰은 압수 수색 과정에서 나온 증거물 23종 가운데, 학생회 문건 2개와 책 1권을 이적표현물이라고 보았다. 정씨는 현재 183번 수번을 달고 서울구치소에 한달 째 수감되어 있다.





DJ 정권 이후 국보법 위반 구속 건수

















전체 구속자(국가보안법 7조 위반)
1998년 413(381)
1999년 286(261)
2000년 128(117)

자료 : 민가협


정씨가 이적표현물을 소지하지 않았다면 불구속으로 수사받거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적표현물을 누구나 소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인권운동사랑방이 검찰과 법원에 정보 공개 청구를 해서 입수한 이적표현물 목록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이적표현물 한두 개는 소지할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사저널〉은 이 자료를 단독 입수해 분석했다. 이 목록에 따르면, 이적표현물로 규정된 도서는 총 1천2백20종에 달한다. 문건은 헤아릴 수 없다. 정씨가 가지고 있었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역시 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목록을 살펴보면, 교양 도서뿐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 등 대학 전공 도서까지 포함되어 있다(표 참조).


대학에서 한국현대사 관련 과목을 수강했다면 교재나 참고 자료로 사용했을 법한, 강만길 교수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해 젊은 소장파 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도 이적표현물로 분류되어 있다. 역사학계의 고전이 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김학준 박현채 공저)도 이적표현물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사회과학 서적뿐 아니라 박노해 시인의 시집 〈참된 시작〉, 권운상씨의 소설 〈녹슬은 해방구〉 역시 적을 이롭게 하는 불온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들은 '교화상 열독 부적당'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교도소내 반입이 지금도 금지되어 있다.


물론 이같은 책을 소지한다고 해서 누구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하다. 그 판단은 검사와 판사에게 달려 있다.


대형 서점에서 '운동권'이 구입하면 이적표현물




김대중 정부 들어서 국가보안법을 유연하게 적용하기가 강조되고 있지만 매년 국가보안법 사범과 이적표현물 소지에 따른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은 양산되고 있다(표 참조). 인권단체는 이적표현물 소지·제작·배포를 규정한 국가보안법 7조(찬양 고무)를 대표적인 악법 조항으로 꼽는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될 수 있는 조항이기 때문이다.


대형 서점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책인데도,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가 구입하면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표현물로 둔갑한다. 반면에 똑같은 책을 리포트를 제출하기 위해서 사면 학술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기에 처벌받지 않는다.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검사나 판사가 '관심법'을 발휘해 판단하는 셈이다.


이적표현물에 따른 국가보안법 위반은 출판인들의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1998년 4월29일 대동출판사 발행인 이상관씨는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 증언반'이 채록한 〈끝나지 않은 여정〉을 발행해, 이적표현물 제작·배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씨가 발행한 책은 서울의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종로서적 등에서 누구나 살 수 있었고, 국회도서관 등 공공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었다. 풀무질출판사 편집장이자 대학 강사인 양효식씨도 1998년 11월25일 국가보안법 7조 5항(이적표현물 제작·배포)으로 구속되었다. 문제가 된 레닌의 저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 강사들이 번역해 대학 교재로도 쓰던 책이었다. 더구나 출간할 때는 문제 삼지 않다가 2∼3년이 지난 시점에서 제작자가 구속되었다.


두 사람 모두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짧지 않은 옥살이를 했다. 1998년 11월25일 홍교선씨는 책갈피 출판사가 출간한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등 11종이 이적표현물로 구분되어 구속되었다. 1년도 안되어 1999년 6월9일 홍씨는 똑같은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 홍씨가 출판한 책들은 서울대·경희대 등에서 교재나 참고 도서로 사용되었고, 책의 저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그 해 방한해서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게다가 똑같은 저자의 책을 다른 출판사가 발행할 때는 문제 삼지 않다가 유독 홍씨가 출판하면, 검찰과 경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그렇다면 이적표현물은 누가 어떻게 판단할까? 최종 판단은 법원이 하지만, 수사 단계에서 검·경은 각 산하 기관에 이적표현물 심사를 맡긴다. 현재 이적표현물 심사는 경찰과 검찰 소속 양대 기구가 맡고 있다. 경찰은 공안문제연구소에, 검찰은 민주이념연구소에 이적표현물 심사를 맡긴다. 정 아무개씨를 포함해 단국대 활동가 조직으로부터 압수한 문건과 책들도 1차로 공안문제연구소가 감정했다.


검·경 산하 연구소가 리스트 작성, 이적성 판단







































































































































































책 제목 저자 출판사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 프리드리히 엥겔스 거름
갑오농민전쟁 박태원 깊은샘
껍데기를 벗고서 백기완·이영희 동녘
경제학의 기초이론 편집부 엮음 백산서당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백산서당
녹슬은 해방구 권운상 백산서당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2 3 박세길 돌베개
다시 그람스에게로 칼보그 한울
독일 이데올로기 칼 마르크스 청년사
러시아 혁명 E. H. 카 한울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선 칼 마르크스 거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책갈피
민족경제론 박현채 동녘
바로 보는 우리 역사 1, 2 구로역사연구소 거름
반듀링론 프리드리히 엥겔스 새길
붉은산 검은피 오봉옥 실천문학사
사회구성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이진경 아침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풍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황석영 풀빛
중국의 붉은별 에드가 스노우 두레
참된 시작 박노해 창작과비평사
철학 에세이 조성오 동녘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박현채 소나무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조진경 백산서당
8억인과의 대화 이영희 창작과비평사
포이에르바하의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백산서당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칼 마르크스 소나무
조국은 하나다 김남주 창작과비평사
한국 근대사·현대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한국공산주의 운동사1 2 3 서대숙 이론과실천
한국사회의 계급 연구 김진균 한울
해방전후사의 인식 송건호 외 한길사


공안문제연구소는 1988년 10월 문을 열었다. 공안문제연구소가 개설되기 전에는 내외정책연구소가 그 역할을 맡았다. 민주이념연구소는 공안문제연구소에 비해 늦게 문을 열었지만(1997년 1월), 대검찰청 산하 기구여서 위상이 공안문제연구소보다 높다. 민주이념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경찰·국정원·기무사 등이 적발한 이적표현물에 대한 최종적인 법률 해석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공안문제연구소가 운영되고 있었는데도 민주이념연구소가 개설된 것은, 1996년 연세대학교 사태 때문이다.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대학가에 퍼진 좌익 사상을 차단하기 위해서 급조되었다. 대검 훈령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적화 전략 전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대공 사범의 동향을 분석·연구하기 위해서 개설되었고, 대검 공안부장이 소장을, 공안기획관이 부소장을 맡고 있다. 대검 공안연구관이 상임연구위원으로, 각 지검의 공안검사가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명 이내의 자문위원은 검찰총장이 임명한다. 이번에 공개된 이적표현물 목록은 바로 민주이념연구소가 분류한 이적표현물에 관한 종합 자료인 셈이다.


지난 6월12일 민주당은 국가보안법 개정 6인 소위원회를 열어 불고지죄와 찬양고무죄를 모두 삭제하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민주당은 올해 안에 국가보안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공동 여당인 자민련은 개정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야당의 보수파 역시 자민련과 한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국가보안법 개정은 불투명하다.


국가보안법 개정이 불투명할수록 책장을 주의해야 할 것 같다. 책장에 꽂힌 책 가운데 한두 권은 이적표현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