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증언하는 '죽음의 진실'
  • 고제규 기자 (unjsua@e-sisa.co.kr)
  • 승인 2001.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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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으로 해부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미스터리/고문->사망->추락 가능성



2001년 12월10일 오전 11시. 기자의 핸드폰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 홍보팀 송정윤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후 2시에 최종길 교수 사건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예고 없는 기자회견이었다. ‘뭔가 터졌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점심도 거른 채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일찍 진상규명위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불난 호떡집이 따로 없었다.


‘세계 인권 선언 기념일’인 12월10일 <국민일보>가 ‘중앙정보부 직원이 최종길 교수를 창 밖으로 던졌다’라고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최교수를 건물 밖으로 던졌다는 전 중앙정보부(중정) 간부의 증언을 진상규명위가 새롭게 확보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진상규명위는 해명성 기자회견을 서둘러 가졌다. 진상규명위 김형태 상임위원은 “사실만 확인해 주겠다.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확인하는 중이어서 판단은 유보한다”라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긴급 기자회견이다 보니, 보도자료도 다급하게 만들어 중요한 증언 부분이 혼란스러웠다. 기자들도 마감이 임박한 때여서 경황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전 중정 간부 ㄱ씨가 진상규명위 조사 과정에서 부하 ㄴ씨로부터 사고 직후 최 교수를 직접 조사한 중정 직원 중 한 명으로부터 그를 7층 비상계단에서 밀어버렸다고 전해들은 것을 보고 받았다고 보도했다. 최교수를 밀었던 ㄷ수사관이 ㄴ에게 털어놓았고, ㄴ이 ㄱ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보도대로라면, ㄴ은 ㄷ에게서 들은 말을 ㄱ에게 전한 중간 보고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혼동이 있었다.


ㄴ은 단순한 중간 보고자가 아니라 현장 목격자다. 진상규명위에 따르면, ㄱ은 사고 당시 최교수 조사실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고함 소리가 난 뒤, ㄱ의 부하 ㄴ이 깨우러 왔고, ㄴ이 7층 비상계단으로 ㄱ을 끌고 갔다. ㄴ은 ‘양손으로 미는 시늉을 하면서 여기서 (수사관들이) 밀어버렸다’라고 목격한 상황을 상관인 ㄱ에게 보고했다.


그의 진술은 1973년 10월 최교수가 숨진 뒤 27년 만에, 지난해 12월9일 진상규명위가 조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결정적인 타살 증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언인 동시에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장 목격자인 ㄴ이 1983년에 이미 숨져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최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수사관은 타살을 부인하고 있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월간 조선>, 중정 조사관 인터뷰 통해 ‘자살’ 주장


당연히 반격이 뒤따랐다. 진상규명위 인터넷 홈페이지에 잇달아 반론이 제기되었다. ‘위원회도 한건주의에 빠졌다’ ‘소설 쓰지 말라’는 등 진상규명위가 의도적으로 타살 증언을 언론에 흘려, 최교수를 타살로 기정사실화한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반격의 백미는 <월간 조선> 2002년 1월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전 중정 조사관을 인터뷰해 실은 기사에서 <월간 조선>은 최교수가 투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현장 검증에 참여한 이 조사관은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사건의 전말을 뚜렷이 기억한다며, 최교수가 투신한 7층 화장실에서 족적을 채취했다고 밝혔다. 최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김 아무개 수사관에게서 전해 들은 정황도 덧붙였다. ‘최교수가 소변을 보다가 갑자기 소변기를 밟고 올라가 열린 창문으로 올라갔다. 두 다리를 감싸안았지만 최교수는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오른쪽 신발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졌다.’




이처럼 최종길 교수 사건은 여전히 자살 증언과 타살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면 상반된 증언을 판가름할 제3의 증언자는 없는 것일까? 가장 결정적인 증인이 있다. 바로 최교수 자신이다. 법의학적으로 따지면 죽은 자도 증언을 한다.


1973년 10월19일 오후 2시50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의사 김 아무개씨(당시 45세)는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입회한 데서 해부를 시작했다. 시신의 키는 156cm이고, 영양 상태는 양호했다. 동공은 혼탁하고, 각막은 이미 반투명 상태, 코에서는 피가 흐른 흔적이 있었다. 양쪽 엉덩이와 등에는 피멍이 선명했다. 왼쪽 팔꿈치 아래 뼈가 완전히 부러졌고, 오른쪽 팔꿈치 위 뼈 일부도 부러졌다. 왼쪽 발은 으깨어져 뼈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그밖에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시신은 바로 이 날 새벽 남산(중앙정보부)에서 국과수로 실려온 최종길 서울대 교수였다.


시신의 증언 1:“나는 10월19일에 죽지 않았다”


중정 수사관 정 아무개씨와 권 아무개씨가 작성한 현장검증조서에 나타난 최교수의 사망 시간은 1973년 10월19일 오전 1시35분께였다. 부검소견서에 따르면, 10월19일 오후 2시30분에 최교수 무릎 아래에 시강(시체경직)이 남아 있다. 법의학적으로 시강은 턱에서 시작해 아래로 진행한다. 사후 10∼12시간 후에 최고조에 달해 시체가 나무판과 같이 단단해진다. 최고조에 달한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발생한 순서대로 소실된다(문국진 교수의 <최신 법의학>에 따르면, 여름에는 24∼36시간, 봄과 가을에는 48∼60시간이 지나면 시강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최교수의 시강이 무릎 관절 아래에만 나타나 있었다면 최고조에 달했다가 소멸되는 쪽이라고 보아야 한다. 주변 온도가 높을수록 시강이 빨라지고, 온도가 낮으면 지연된다. 기상청 관측에 따르면 1973년 10월19일 최저 기온이 6.4℃였음을 감안하더라도 13시간20분은 시강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풀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또한 동공이 혼탁한 것을 고려하면 최교수는 10월19일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부검의는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데 기본이 되는 직장내 온도를 측정하지 않았다. 부검의는 결정적인 증언에 스스로 귀를 막은 셈이다.

시신의 증언 2:“나는 고문당했다”


최교수의 양쪽 엉덩이 피부 아래에는 출혈 흔적이 있었다(40쪽 사진 참조). 일반적인 사후반점(사반)의 색조와는 구별된다. 부검의도 피하 출현반이 보인다고 소견서에 기록했다. 사반과 구별되는 피하 출현반은 구타당한 결정적인 증거다. 추락으로 인해서 생기기 힘든 오금쪽에 찰과상이 있는 것도 각목을 끼우고 무릎 꿇리는 고문을 당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상처다. 이런 명백한 고문 증거가 있는데도 부검의는 엉덩이 부분을 절개해 열어보지도 않았다.

시신의 증언 3:“나는 두 번 죽었다”


법의학적으로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죽음을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사후 추락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교수의 시신에는 추락해 발생한 상처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사후 추락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로 왼쪽 발의 상처부위다. 최교수 신체 부위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노출된 파열 상처인데, 피가 흘렀거나 피가 굳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왼쪽 사진 참조). 닦아 냈다고 하더라도 너무 깨끗하다. 심장의 기능이 정지된 뒤 상처가 생겼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상태에서 추락해 즉사하면 혈압이 떨어져 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시신의 증언 4:“현장 검증 사진은 조작됐다”


부검 사진이 컬러인 데 반해 현장 검증 사진은 흑백이다(38쪽 사진 참조). 원칙적으로 부검이나 현장 검증 때 컬러 필름을 사용해야 하는데, 당시 촬영자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기 위해 흑백 필름을 사용했다고 진상규명위 조사 과정에서 해명했다.

기본 수칙을 무시한 부검


현장 검증 사진을 보면 머리 쪽에 피를 많이 흘린 자국이 선명하다. 반면에 으깨진 왼쪽 발 부위는 피를 흘린 흔적이 없다. 현장검증조서에도 ‘두부 파열로 절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부 파열이란, 머리가 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검 소견서에 따르면, 최교수의 머리에는 외상이 없다. 두부 안에서 피가 고여 굳어 있을 뿐이다. 코와 귀를 통해 피가 많이 흘러나왔다 하더라도 현장 검증 사진처럼 엎어져 있지 않고 누워 있는 상태에서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진상규명위는 현장검증조서마저 나중에 조작되어 만들어졌음을 밝혀냈다.


<월간 조선> 2002년 1월호에 나온, 현장을 조사했다는 중정 요원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30년 전 일이지만 뚜렷이 기억한다’는 수사관은 최교수의 자살을 막기 위해 중정 요원이 두 다리를 감싸 오른쪽 신발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장검증조서에는 최교수의 오른쪽 신발이 화장실 바닥이 아니라, 머리 위쪽 3m 지점에 놓여 있다. 그는 조작된 조서의 내용마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1973년 10월19일 오후 3시50분. 국과수 의사 김 아무개씨는 1시간 동안의 부검을 마쳤다. 나흘 뒤 위장내 독극물 검사까지 끝내고 그는 최종길 교수의 사인을 심장 파열과 두개저 골절로 결론지었다.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직장내 온도도 측정하지 않고, 골절 부분 엑스선도 찍지 않은 채 김씨는 사인을 결론지었다. 법의학은 부검을 통해 사인만 밝히는 학문은 아니다. 사건과 죽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근거를 제시하거나 밝혀야 한다. 그런데도 최교수 부검은 기본 절차마저 무시한 셈이었다.


2001년 12월10일 오후 2시30분. 김형태 위원은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김위원은 “최교수가 조사 과정에서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도 없다. 피의자 신문조서는 사후에 작성되었다”라고 말했다. 간첩이라고 자백하지 않았기에 최교수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위원은 중정 수사관들이 가사 상태에서 최교수를 밀었는지 사후에 밀었는지는 정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제 판가름은 최교수의 증언을 제대로 들어줄 법의학자에게 달려 있다.


도움말:임형진(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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