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뒤흔든 ‘신준식 게이트’
  • 전남 순천·나권일 기자 (nafree@e-sisa.co.kr)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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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공사 수의계약 청탁한 ‘로비 리스트’ 나와…시의원 등 수백명 끼어
권력형 부패라면 지방자치단체도 중앙 정부에 못지 않다. 전남 순천에서 이른바 ‘신준식 리스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2000년 2월부터 12월까지 순천시가 발주한 관급공사 수의 계약 3백여 건의 청탁자 이름이 적힌 이 명단에 연루된 인원만 수백 명에 이른다.


신준식 순천시장(63·구속)과 순천시 회계과에 로비한 인사들 가운데는 시의회 의원 19명과 방송사 간부 및 지방 신문사 순천주재기자, 민주당 순천지구당 당직자, 전라남도의원. 순천시청 고위 공무원 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특정 건설업체에 공사를 달라고 뛰어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검찰이 2001년 2월3일 순천 S주택건설 대표 신 아무개씨(52)로부터 2억3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신준식 시장을 구속한 뒤 드러났다. 당시 수의 계약 업무 담당자인 최 아무개 회계과장이 ‘수의 계약 의뢰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이 문건에 공사를 수주한 건설업체와 도급 액수는 물론 이를 청탁한 인사들의 이름과 직책, 그리고 시장이 특별 배려를 부탁한 건설업체 이름까지 상세하게 메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씨는 공사 계약 날짜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긴 뒤 계약자 옆의 비고 난에 ‘MBC ○부장’ ‘○○신문 기자’ ‘○○○ 의원’ ‘도로과 요청’ ‘○○ 과장’ 등 수주를 위해 힘쓴 청탁자들의 이름을 연필로 적어놓았다. 신준식 시장이 직접 지시해 업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이는 공사 10여 개의 경우 계약자 이름 아래에 ‘신’이나 ‘신시장’이라는 작은 글씨로 따로 표시해 놓았다. 여러 명이 부탁했는데도 탈락한 사람 이름 옆에는 ‘불가능’이라고 적거나 ‘×’표를 했다.




최 아무개 과장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결재를 받을 때 서류에 청탁자의 이름을 미리 연필로 기재해 놓으면 시장이 참고해 업체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순천시의 공사 한 건당 수의 계약 액수는 평균 5천만∼9천만 원이었다(현행 국가계약법에 따르면 수의 계약 액수는 건당 1억원을 넘지 못한다).
사실 검찰로서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지방자치단체의 비리 실태를 발가벗겨 관급 공사와 관련한 금품 수수 관행에 철퇴를 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신시장이 구속되자 순천 시내에는 ‘시장뿐만 아니라 일부 시의원과 주재기자들도 수의 계약을 알선하고 수백만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검찰, 지역 유지 40여명 소환 조사


그러나 이 사건은 광주지검 순천지청이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는 바람에 의혹만 남긴 채 묻히고 말았다. 당연히 검찰의 뜨뜻미지근한 수사를 질타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이 지난 9월20일 광주 고검·지검에 대한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검찰을 집중 추궁하며 적극 수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이 수사를 미루자 시장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성명과 광주 CBS·<순천내일신문> 등 언론 매체들의 폭로 보도도 잇달았다.


결국 광주지검 순천지청(지청장 이복태)은 지난 12월부터 이미 확보하고도 묵혀두었던 A4용지 80장에 달하는 청탁자 명단을 토대로 수사에 들어갔다. 검찰 수사 내용은 순천시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순천지청 이용주 검사가 우선 3건 이상 청탁한 것으로 명단에 이름이 오른 순천 지역 인사들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하기 시작하면서 부패의 규모가 서서히 드러났다.
순천시의회 의원 22명 가운데 시의회 의장과 부의장을 포함해 19명이나 검찰의 소환 대상 명단에 올랐다. 지방 일간지 및 방송사 기자 7명, 전남도의원 3명, 순천시 공무원 7명, 민주당 순천지구당 전직 당직자 2명도 검찰로부터 출두 요구서를 받았다. 시·도 의원과 기자·공무원 등 무려 40명에 이르는 ‘지역 유지’들이 공사 수주를 알선하거나 부탁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소환 대상자 가운데는 순천 출신인 조보훈 전라남도 정무 부지사의 동생 조 아무개씨(순천 ㅎ건설 대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ㅎ건설은 2000년 5월 하수도 정비공사와 관련해 도급액 3천4백여만원짜리 공사를 맡는 등 여러 건을 수주했다. 그러나 조 부지사는 “(문제가 된 수의 계약 공사와 관련해) 직접 전화하거나 청탁한 적이 없다”라고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들 40여명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수의 계약 알선을 대가로 금품이 오갔는지 여부를 조사했지만 대부분 청탁한 사실은 있지만 계약 건설업체로부터 대가성 있는 금품을 받지는 않았다면서 금품 수수 혐의를 부인했다. 시민들은 이미 예상한 대로 ‘태산명동 서일필’이라고 비아냥댔다.



2000년도 순천시의 수의 계약 총액은 수해피해 복구공사 1백20건을 포함해 총 4백61건에 1백73억원이나 된다. 2001년에는 총 3백28건에 1백38억여원을 집행했다. 순천시는 말썽이 확대되자 6월부터 수의 계약 한도 액수를 건당 5천만원 이하에서 3천만원 이하로 낮추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셈이다.


“동네 권력자들은 다 연루되어 있는 셈”


순천시 관계자들은 억울하다고 호소도 한다. 순천시 회계과의 한 간부는 “순천시 관내에 등록된 건설 관련 업체만 9백여개이다. 특정 업체에 공사가 편중되면 말썽이 생기기 때문에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담당자가 참고용으로 메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애써 명단의 의미를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시민의 분노는 상당하다. 한 네티즌은 “기자·시의원·정치권·고위 공무원이 공사 청탁에 개입했다면 동네 권력자들은 다 비리에 연관되었다는 말이다. 청탁한 시의원과 기자 명단을 모두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현재 기갑서 부시장이 10개월째 시장 업무대행을 맡고 있고, 신준식 시장은 2심 재판에서까지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상태이다. 시민단체가 2001년 2월 신시장이 구속된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97.6%가 시장 사퇴를 요구했지만 신시장은 대법원 판결까지 지켜 보겠다며 요지 부동이다.


이 사건으로 ‘자방자치단체가 발주하는 공사는 지방 토호들의 밥’이라는 입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특히 민선 단체장은 수의 계약 공사 수주를 미끼로 자연스럽게 사전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검찰 관계자는 “민선 시장이 국가 예산을 사용하면서 인정에 휘말려 공사를 수주하게 도운 것은 사실상 사전 선거운동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학영 순천YMCA 사무총장은 “시민 의식이 성숙해지면서 부정부패의 견고한 카르텔이 깨지고 있다. 이런 통과의례적인 진통을 겪고 나면 자치단체 행정이 더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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