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생사라도 알려 달라”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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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가족들, 정부 무성의에 허탈·분노의 절규


'쌍방은 적십자 인도주의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들에 대한 생사 주소 확인 문제를 협의·의결한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54)은 지난 9월8일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 합의서에 나온 문구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지내던 아버지 이성환씨(1920년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생사 확인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김복남씨(80)는 “만세”라고 외치며 기뻐했다.



이씨의 부친과 큰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의사였던 큰아버지가 1950년 7월 말께 먼저 납북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4일 유기공장을 운영하던 이성환씨에게 북한 정치보위부 ‘유소좌’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고향(평북 박천)과 서북청년단 활동에 대해 물어보고는 좀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이씨를 데려갔다. 이씨는 광복 후 미군 통역관으로 일했었다. 1주일 뒤에 돌려보내주겠다고 했으나 가족이 이씨를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남북 적십자회담 합의서가 발표되고 이씨도 바빠졌다. 그는 전쟁 당시 납북인사 가족들로부터 받은 생사확인의뢰서를 9월11일 통일부와 적십자사에 접수했다.
납북인사 가족 이경찬씨(64)도 생사확인의뢰서를 제출했다. 이씨의 부친 이주신씨(1910년생)는 전쟁 때 서울지검 부장검사였다. 서울 창신동에 살던 부친은 전쟁이 나자 6남매를 친척집에 나누어 맡기고 은거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경찬씨는 자신을 친척집에 맡기고 돌아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씨의 부친은 길에서 잡혀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다. 7월 하순 밤중에 청량리로 이송되었고, 그후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가 고위 인사였기 때문에 북에서도 특별 관리를 했을 것이다. 사후 유해라도 모셔 오고 싶다. 내가 살아 있을 때 해결해야지 다음 세대만 해도 기억에 없으니까 관심이 없다. 이제는 정말 가족사의 비극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김만철씨 일가족 데려오고 동진호 선원 포기



적십자 회담 결과를 보고 마음이 들뜨기는 정전 협정 이후 납북자 가족도 매한가지다. 납북자가족협의회 최우영씨(33)는 적십자 회담 결과가 담긴 지난 4월9일 아침 신문을 보고 또 보았다. 북한에서 먼저 납북자 문제를 제의했다는 데 더욱 놀랐다.



최우영씨의 부친 최종석씨(58)가 납북된 날은 1987년 1월15일. 최씨는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 중 납북된 동진27호의 어로장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대한적십자사의 송환 요청에 북쪽은 ‘관계 기관에서 조사한 후에 절차에 따라 송환해주겠다’는 긍정적 회신을 보내왔다.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박종철씨 고문 치사 사건으로 떠들썩했고, 동진호 사건이 있기 전날인 1월14일 김만철씨 일가족이 북한 청진항을 떠났다. 박종철씨 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정부는 일본에 머무르는 김만철씨 가족을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의 태도도 변했다.


북한은 ‘일본으로 가 있는 김씨 일가가 망명이라도 한다면 동진호 또한 남한을 탈출해 망명한 것으로 인정해도 남측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는 내용을 담은 전통문을 보내왔다.
한 달이 지난 설날 무렵, 동진호 선원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에서 타이완으로 가 있던 김만철씨 일가가 한국으로 온다는 텔레비전 뉴스가 나왔다. 모녀는 그 뉴스를 보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결국 동진호 선원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1999년 1월 말 최우영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 동진호 선장이 간첩으로 활동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을 보고 최씨는 발표 기관인 국정원으로 전화했다. 국정원은 민원은 통일부로 하라고 했고, 통일부는 발표 기관이 아니라 내용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최씨 가족은 최씨가 납치되던 해 4월 간첩으로 몰렸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세금을 왜 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정부만 믿고 있을 수 없어 납북자 가족 모임을 만들었다”라고 최씨는 말했다. 정부는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을 때는 ‘다음에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이라고 미루었고, 정상회담으로 관계가 좋았을 때는 ‘납북자 문제가 대화의 걸림돌인 것처럼’ 대했다.



최씨는 2000년 9월 양심수 후원회의 주선으로 북으로 가는 비전향 장기수를 만났다. 꽃다발과 서신, 생사 확인 명부를 건넸다. “장기수 송환을 반대하지 않는다. 가족이 가족을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정부도 우리 납북자 문제에 대해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심정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인천시 청천동에 사는 박원출씨(79)는 지난 9월3일 적십자사로부터 ‘생사 여부 확인 불가능’ 회신을 받았다. 박씨는 2년 전 이산가족상봉단 신청서를 냈다. 지난 8월에는 5차 이산가족상봉단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건강검진서를 끊어 제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아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박씨의 아들 이천석씨는 1974년 2월15일 조업중에 백령도 근해에서 납북되었다. 이천석씨가 타고 있던 수원32호는 당시 총격을 받아 침몰했고, 수원33호는 납북되었다. 당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들에게서 침몰하던 배에서 탈출한 선원들을 북한 경비정이 태우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씨의 부친은 아들이 납북된 이후 단파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들었다. 라디오에서 아들의 이름과 통신사라는 직책까지 나왔다. 박씨는 아들이 북한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박씨의 딸 이금숙씨(40)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용하다는 점술가들을 여러 차례 찾아갔다. 달리 알아볼 방법도 없고. 생사 확인 불가라는 편지는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된다고 일러주는 전화 한 통 없다”라고 말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한결같이 생사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의 한 관계자는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던 북측이 먼저 제의했다는 것은 분명 큰 진전이지만 포괄적으로 합의한 사안이다. 10월 중 실무회담에서 납북자 생사 확인에 대한 세부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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