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사고가 난 이후 대구 시내에 있는 병원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부상자 명단에도, 사망자 명단에도 아내의 이름은 없었다. 목격자도 없었다. 김씨는 목격자를 찾기 위해 아내의 사진과 정황을 담은 대자보를 사고 현장에 내걸었다. 휴대폰 통화 내역을 요청하고, 종합 검진 기록과 치과 필름 등을 발급받아 제출했다. 네일 아트 학원에 가서는 사정을 설명하고 확인서를 받아왔다. 그는 “죽어서도 실종자라는 것이 원통하다. 한 줌이라도 유골을 찾고 싶다”라고 말했다.
2·18 대구 지하철 참사 실종자. 그들은 죽어서도 사망자가 아니다. 실종자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식구를 떠나보낸 슬픔을 달랠 겨를도 없이 가족의 ‘인정 사망’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인정 사망이란, 대형 화재로 인해 사망이 거의 확실해도 시체를 찾지 못한 경우 관공서의 조사에 따라 호적부에 사망 사실을 기재하는 제도이다.
2월27일 오후 2시, 합동 분향소가 있는 대구 시민회관 대강당 앞.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직원이 단서가 될 만한 증명서나 물건을 접수하고 있었다. 88번 박지혜양의 부친은 딸의 모습이 찍힌 대구역 CCTV 사진과 재학 증명서를 제출했다. 1·2번 유가족은 최금자씨(2번)가 끼고 있던 반지와 동일한 반지 사진을 구해왔고, 함께 실종된 지정윤양(1번)이 신었던 운동화와 똑같은 것을 사 왔다. ‘친구랑 학용품 사러 간다’고 딸이 남긴 문자 메시지를 찍은 사진과 함께, ‘지하철 차비’라고 적힌 딸의 용돈 기입장을 복사해온 어머니도 있었다. 오후 6시까지 ‘증거’를 가지고 오는 실종자 가족이 줄을 이었다.
실종자 유가족들은 매캐한 냄새가 나는 폐허 같은 중앙로역을 지키고 있다. 참사 뒤 바로 물청소를 해 현장을 훼손한 대구시나 경찰이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믿지 못해서이다. 한 유가족은 “경찰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찰이 잘못할까 봐 지킨다”라며 허탈해 했다.
유전자 검사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경기도 이천에서 온 박규동씨(47)는 중앙로역 1층을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 사는 모친 남봉주씨(69)는 매주 두 번씩 한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오전 진료 예약을 했다. 남씨는 오전 9시5분께 박씨의 여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한의원에 늦겠다. 그만 끊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대구로 달려온 박씨는 CCTV를 확인하기 위해 어머니가 지하철을 탔을 동대구역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동대구역은 폐쇄 회로 녹화를 아예 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핸드폰도 없었다.
박씨는 한의원의 예약기록증명서·열쇠·안경 등을 국과수에 제출했다. 채혈을 한 박씨는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미확인된 유골 가운데 유전자 정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도대체 어머니의 사망이 언제 인정될지 걱정이다. 그는 “곧 봄방학이 끝나 아이들이 등교해야 하고, 직장에도 복귀해야 하는데. 누가 여기를 지키나. 장례는 어떻게 할지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2월27일 오후 6시15분. 시민회관 1층 유가족 대기실 앞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책위가 2월25일 안심 기지창 야적장에서 발견한 유류품 사진을 벽에 붙인 것이다. 주민등록증·머리카락·신발·가방 등을 촬영한 사진이 벽에 붙자 유가족들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저런 증거를 청소한다며 쓰레기처럼 버려놓고, 이제 와서 우리 보고 가족이 죽었다는 증거를 대란 말인가!” “대구시청으로 가자!” 흥분한 유가족들은 때마침 방문한 고 건 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2층 분향소로 몰려갔다. 고총리는 경호원들의 도움을 받고 가까스로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실종자 신고 중에는 이번 지하철 참사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경우도 간혹 눈에 띄었다. 서울에서 온 한 50대 남자는 지난해 10월 가출한 부인과 딸의 실종 신고서를 국과수에 제출했다. 한 30대 남자는 “언제 가족과 연락이 끊겼느냐”는 질문에 “1999년”이라고 대답했다.
대책위에서 대책위원으로 활동하는 전재영씨(43)는 이번 참사로 아내 박미영씨(39)와 딸 전혜진양(7)을 잃었다. 딸아이의 언어 치료를 위해 영남대 병원으로 가던 길이었다. 김천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전씨도 다른 유가족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에게는 엄마와 동생이 병원에 입원해 아빠가 간병해야 한다고 말해둔 상태이다. 그는 기차역과 대구역 폐쇄 회로에서 아내와 딸의 모습을 확인하고 탑승 확인서도 받았다. “처음에는 시신을 찾을 엄두도 못 냈다. 불에 타 괴로워할 모습만 떠올리면….”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전씨는 대구시의 무성의를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조해녕 시장은 실종 신고가 3백여 건에 이를 때에도 실종자 수가 72명이라고 말했다. 말로는 완벽을 기했다고 말하지만 믿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2월28일 정부는 고 건 총리 주재로 대구 지하철 참사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중앙특별지원단’을 구성하기로 했다. 이 날 회의에서 실종자 확인 논란과 관련해 인정 사망 여부를 심사할 위원회를 구성하고, 유가족측이 추천하는 변호사·법의학자·종교계 인사 등을 포함하기로 했다. 심사위가 구성되고 나면 사망 인정 기준을 둘러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다가 사망 증명까지 해야 하는 실종자 유가족의 안타까운 비극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