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차별적 해고자’의 기나긴 법정 싸움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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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사협회 정영임씨, 40세에 ‘성차별적 퇴직’당하고 3년째 투쟁
정영임씨가 회사로부터 정년 퇴직 통보를 받은 것은 2001년. 당시 정씨 나이는 40세. 많은 회사가 인사 적체를 해결하기 위해 직급 정년을 도입한 마당에 정씨의 사연은 특출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씨는 그로부터 3년째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다. 여성단체까지 성차별 사례라며 가세하고 나섰다. 지난 10월7일 한국여성민우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토론회 ‘정영임 40세 직급 정년 사건, 왜 성차별인가’를 공동 주관했다.

정영임씨가 정부 산하 단체인 한국전기공사협회(전기협회·1964년 설립, 대표 김창준)에 행정직 6직급으로 입사한 것은 1985년. 그녀가 5직급으로 승진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15년 뒤인 2000년이었다. 이 승진은 별 의미가 없었다. 두 직급 모두 정년이 40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례가 왜 성차별인가. 정씨가 입사한 이듬해인 1986년 회사는 6직급을 없애고 ‘상용직’으로 전환했다. 호봉 승급만 있을 뿐 승진이 없고 다른 직군으로 이동도 불가능한 이 상용직 직제는 무려 10년 동안 유지되었다. 문제는 해당자가 모두 여직원이었다는 점이다. 전환 당시 행정직 최하위 직급인 6직급에는 남자 사원이 단 한 명도 없었고, 거꾸로 5직급 이상에는 여자 사원이 한 명도 없었다.

전기협회는 10년 뒤인 1996년 상용직제를 폐지하고, 다시 6직급을 부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교롭게 호봉 체계를 9호봉에서 20호봉으로 늘렸다. 이와 같은 호봉 확대 조처는 통상 3~4년 만에 승진해온 다른 직급(모두 남성)에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여직원의 발목을 다시 한번 붙잡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나마 6직급이 부활되면서 그 어려운 여건을 뚫고 여직원 최초로 승진자가 나왔다. 고졸 사원 최 아무개씨가 입사한 지 무려 19년 5개월 만에 5직급으로 승진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정년 40세에 걸려 1999년 정년 퇴직했다.

정씨는 채용과 승진에서 모두 성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남성 5급(초대졸·대졸), 여성 6급’(고졸·초대졸)이 관행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정씨가 입사하기 전에는 고졸 남자 사원도 5급으로 채용된 사례가 있다. 초대 졸업자인 정영임씨는 6급에 채용되었다. 이와 같은 관행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왔다. 급기야 2000년 산업자원부로부터 같은 학력(초대졸)인데 남성은 5급으로, 여성은 6급으로 채용하는 관행을 시정하라고 권고받았다. 문제의 상용직제에 대해서는 협회 스스로 성차별적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즉 1996년 직제 개정 사유로 남녀고용평등법에 배치되고 있다는 점을 든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부당해 보이는 정씨의 40세 정년 퇴직 사건은,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와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가 전기협회측 손을 들어주었으며 행정 소송에서도 정씨는 패했다. 고등법원에 항소하면서 비로소 정씨는 여성민우회 문을 두드렸다.

정씨는 왜 패했을까. 지노위와 중노위는 회사측 논리를 상당 부분 그대로 수용했다. 회사측은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은 것이 모두 여직원이라고 해도,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무 보조라는 업무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부당한 성차별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법원은 무성의하고 중노위는 회사 편들어”

정씨 주장은 다르다. 전기협회의 주요 업무가 회원사 민원을 처리하는 것으로 6직급과 5직급의 실제 업무가 크게 다르지 않고, 자신의 경우 지방 순환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과장(3급)이 파견 근무로 공석일 때에는 업무를 대행하기도 하는 등 실제 업무에서 기안자 혹은 담당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정씨는 전기협회 조직 특성상 간부를 제외한 직원이 3~4명에 불과한데 그 중 1~2명인 여직원이 모두 보조적이고 부수적인 업무만 수행한다면 전기협회의 지회들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정씨는 1심 재판에서 자신이 기안자로 되어 있는 공식 문서와 협회측 부장의 증언 등을 증거물로 재판부에 제출했으나, 판결문 어디에서도 재판부가 정씨의 주장을 고려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기할 만한 점은 중노위 판결문 중에 ‘이미 폐지된 규정의 무효를 다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대목이다. 즉, 회사가 이미 상용직제를 없앴고, 이후 승진한 여성 근로자가 나오고 있으니 상용직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씨는 상용직제 때문에 근무 기간 16년 가운데 무려 10년 동안 승진이 가로막혀 있었고, 그 바람에 ‘40세 정년’에 걸려 퇴직해야 했다. 그런데도 중노위는 누적된 차별의 결과 부당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지 아예 판단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행정법원 재판부도 무성의한 대목이 엿보인다. 여직원 승진에 소요된 기간을 계산하면서 6직급 환원 이후인 1996년부터 계산해 여성들의 승진 연한이 남성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게 계산하면 정씨는 4년 만에 승진한 꼴이 된다. 하지만 정씨는 상용직제 도입 전에 6직급으로 입사했으니 15년이 걸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순경 교수(이화여대·여성학)는 “행정법원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지노위나 중노위가 회사측 주장을 숙고한 듯하다. 법원은 성(性)인지적인 사고가 미숙할 뿐 아니라 성의도 부족하다”라고 꼬집었다. 양현아 교수(서울대·법학)는 이 사건을 과거 ‘여행원 제도’의 틀로 파악하면서 “성별에 따라 아예 직군과 코스를 분리 적용해, 여직원을 사무 보조·저경력 범주 속에 가둬두는 성차별적인 인사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라고 지적했다.

어쩌면 정씨는 남 좋은 일만 하고 정작 본인은 괘씸죄에 걸려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정씨가 처음으로 사건을 여성부에 진정하자마자 공교롭게 회사는 두 여직원에 대해 각각 5급, 4급 승진 발령을 냈다. 이 조처가 이례적인 이유는 5급 승진자(대졸)는 5년 만의 ‘초고속 승진’이었고, 4급 승진자는 여직원 최초의 사례로, 이 조처로 40세 정년에서 구제되었기 때문이다. 전기협회측의 이와 같은 조처는, 법원이 ‘5급과 4급에 승진한 여성이 있으니 협회에 성차별은 없다’고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정씨는 “전기협회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대응이 늦었다. 이제는 물러설 수가 없다. 오히려 부정적인 선례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건 초기 정씨에게 계약직 재입사를 권유했다던 전기협회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총무부 인사 담당자는 “법정에서 안되니까 바깥에 떠들고 다니나 본데, 취재에는 응하지 않겠다. 궁금하면 법정으로 오라”며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기협회 여직원들은 대체로 입사 5년 이내에 퇴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전기협회로서는 20년이 넘도록 승진한 여직원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조직에서 그토록 오래 버틴 정씨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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