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사태 개입’ 고민하는 미국
  • 뉴욕·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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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라이베리아 사태 적극 개입 꺼려
미국, 라이베리아 사태 적극 개입 꺼려…후세인은 제거하고 테일러 만행은 못본 체

그는 14년간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파를 처단했다. 발목과 팔목을 자르고 귀와 입술을 도려내고 총살해 길거리에 버렸다. 국고를 털어 자신의 쌈지돈처럼 마구 썼고, 9·11 테러의 배후 알 카에다 조직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였다. 비밀 경찰 총수인 장남은 어린 소년들을 강제 징집해 살인부대를 만들었고, 부녀자들을 마구 납치해 겁탈했다.

사담 후세인의 얘기가 아니라, 찰스 테일러 라이베리아 대통령 얘기다. 테일러는 지난주 가족과 함께 망명지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쫓기다시피 황급히 떠난 것이 아니라, 공항에서 엄숙한 환송식을 거행한 후 여행 가방 80여개를 싣고 유유히 떠났다. 그는 수도 몬로비아를 떠나기 하루 전 대국민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자신을 강압적으로 하야시킨 부시 미국 대통령은 라이베리아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테일러는 국내외에서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으로 유엔 특별법정에 기소되어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다. 그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1980년대 말 테일러는 리비아에서 테러 훈련을 받고 있었다. 당시 세계 곳곳에서 혁명을 지원하던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은 특히 아프리카에서 찾아오는 ‘혁명아’들을 환대하고 군사훈련·자금·무기 등을 제공했다. 그 중에는 라이베리아의 이웃 시에라리온에서 온 반정부 혁명연합전선(RUF) 지도자 포다이 살코도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두 나라에서 온 테일러와 살코는 쉽사리 의기 투합했다.

테일러가 먼저 반란에 성공했다. 그는 1989년 몬로비아에 입성해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에 눈독을 들인 테일러는 살코의 RUF 반군을 적극 지원했다. RUF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잔인한 폭력 집단이 되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어린이 수천명, 심지어 일곱 살짜리까지 마구 붙잡아 소년특수부대를 편성하고, 이들에게 마약을 먹여 반대파 살육에 동원했다. 테일러는 RUF 살인부대에 마약·무기·피난처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다이아몬드를 챙겼다.

테일러는 반군을 이끌고 정부군을 내쫓는 과정에서, 그리고 집권후 반군과의 내전 과정에서, 14년간 RUF보다 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인구의 10%인 30만명이 내전으로 죽었고, 100만명이 집을 잃고 고향을 등졌다. 지난 2개월 동안 반군 수도를 거의 점령하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민간인 3천명이 쌍방에 의해 살해되었다.

시에라리온과 마찬가지로 라이베리아 내전은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는 무장 세력 간의 돈벌이 싸움이다. 보석을 돌산에서 어렵게 캐내는 것이 아니라 강바닥에서 찾아낸다. 반정부 세력인 ‘화해와 민주를 위한 라이베리아 연합’(LURA)도, 테일러의 ‘국민전선’(NPIL)도, 제2 반군 세력인 ‘라이베리아 민주 해방운동’(MODEL)도 ‘다이아몬드 정권’ 쟁탈을 위한 무장 집단에 불과하다고 <워싱턴 포스트> 더그 파라 특파원은 진단한다.

그는 테일러가 알 카에다와 다이아몬드를 거래해 수천만 달러를 챙겼다고 폭로했다. 이같은 사실은 유엔 특별법정의 D. 그레인 검사(미국 국방부 전 감사실장)와 A. 화이트 조사관(미국 국방부 전 조사관)이 조사·확인했으나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공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는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 은행 계좌 동결이 뒤따를 것을 예상해, 거사하기 몇 달 전에 운반과 은닉이 손쉬운 다이아몬드를 테일러로부터 사들였다는 것이다. 파라 기자는 테일러와 알 카에다 관계가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 관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데도 미국 정부가 테일러를 제거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란 무엇일까?

테일러가 망명지에 도착하던 날 유엔 특별검사는 테일러를 체포해 인도하라고 나이지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미국 정부도 다음날 같은 요구를 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는 국제법상 그같은 요구에 응할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유엔본부 출입기자들과 일부 관리들은 미국 정부가 테일러 체포 압력을 서두를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테일러가 망명한 것이 라이베리아의 평화로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테일러 잔당과 LURD·MODEL 등 반군 세력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중무장한 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들은 테일러를 계승한 브라 전 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 나라에 진주해 있는 서아프리카경제협력국(ECOWAS) 평화유지군 주축인 나이지리아군 병력 7백50여명으로는 잡다한 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결국 미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해 치안을 확보하고 구호 식량 배급을 보장해야 한다고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해병 3천5백명을 태운 전함 3척을 한 달째 몬로비아 항구 밖에 정박시킨 채 관망만 하다가 이번 주 2백명을 상륙시켰을 뿐이다. 이 병력은 구호 식량 운반 등 ‘인도적 지원’을 위한 병력일 뿐, 치안 유지를 위한 전투 병력은 아니라고 미국 정부는 분명히 밝혔다. 미국의 구상은 아프리카경제협력국 평화유지군으로 하여금 치안을 담당케 해, 오는 10∼11월 라이베리아 임시정부 수립을 완료하고, 내년 2월께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대치한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한 명분은 ‘대량살상무기 파괴와 핵무기 제조 방지’였다. 그같은 명분이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점차 확실해지자, 미국은 ‘포악한 독재자로부터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 후세인을 제거하고 두 아들을 살해했다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후세인보다 죄질이 훨씬 잔악하고 파렴치한 테일러와 그 아들 처키는 망명지로 무사히 내보냈다. 나이지리아 남부 도시 칼라반의 대저택에 온가족과 함께 머무르고 있는 테일러는 당분간 유엔 법정에 인도될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나이지리아의 주간지 <뉴스 워치>는 예견했다. 왜 그럴까?

테일러는 미국 내 보수 유력 인사들의 지지와 보호를 받아왔다. 그 첫째 인물은 패트 로버트슨 목사. 막강한 기독교방송네트워크(CBN) 텔레비전의 실질적 소유자인 로버트슨 목사는 라이베리아 다이아몬드 채굴 사업에 8백만 달러를 투자한 거부이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테일러가 침례교회 형제이며 훌륭한 기독교 신자라고 찬양하고 “유엔이 테일러를 기소하는 것은 난센스이며 기소 중지돼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세계적 다단계 판매 회사 암웨이의 공동 창업주 리처드 디보스도 라이베리아 다이아몬드 채굴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는 공화당 내 최대 정치헌금 기부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난 대선 때 부시에게 거액의 선거후원금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테일러는 10여 년간 미국 하원 흑인 의원을 비롯한 흑인 지도자들에게 재정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는 로버트슨 목사와 코드는 맞지 않지만 대통령에 출마한 적이 있는 제시 잭슨 목사도 있다. 카터 대통령도 한때 테일러 지지자였다.

테일러는 알 카에다와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면서 수집한 알 카에다의 자금 이동 정보와 관련 인물에 관한 정보를 줄곧 미국 정보원에게 전달해 왔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은 테일러의 만행을 못본 체해왔다.

미국이 전투 병력 상륙을 꺼리는 이유는, 전후 이라크에서 계속되는 미군의 인명 피해, 아프가니스탄의 정치·군사적 혼란 상태, 1999년 소말리아 내전 개입시 발생한 막대한 피해 등 미국의 중동·아프리카 피해 콤플렉스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이 거의 매일 1명꼴로 살해되자 미국에서는 최근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키라는 서명운동이 파병 가족 사이에 확산되고 있다. 내년 재선을 노리는 부시는 미국에 아무런 이익도 줄 수 없는 ‘쓸모 없는 나라, 버려진 땅’에서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희생시켜 국민 여론을 악화시켜서는 안된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흑인 표도 의식해야 하는 그로서는 라이베리아 앞바다에 해병대와 전함을 정박시켜 ‘파병한 시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이같은 부시의 태도에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해내고 있다.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기 위해 15만명을 파병한 미국은 ‘개처럼 죽어가는 흑인들’을 위해서는 단 한명의 전투병도 보내지 않고 있다. 미국은 라이베리아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나이지리아의 유력지 <데일리 챔피언>은 냉소적 사설로 미국을 규탄했다.

중동 출신 뉴욕 주재 특파원은 기자에게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유엔 결의를 완전 무시한 미국이, 이번에는 유엔군 파병을 재촉하는 독선적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한 아프리카 출신 기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전쟁으로 수천명씩 죽어가는데, 마치 홍수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한 것처럼 인도적 차원의 구호 활동만을 하겠다는 미국의 태도는 강대국의 비도덕성을 넘어선 위선이다”라고 힐난한다.

1989년 내전 때 라이베리아 주재 김용집 한국 대사는 북한 대사와 같은 차를 타고 몬로비아를 탈출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김대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교관 생활 30여년에 그런 지옥 같은 나라는 처음 봤어요.” 미국은 지금 지옥에 반 발짝을 들여놓은 채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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