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때리기’ 팔 걷어붙인 푸틴
  • 모스크바/정다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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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털’ 러시아 기업인들 검찰 수사 ‘철퇴’…대선 승리 등 다목적 포석인 듯
한동안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신흥 재벌 ‘올리가르흐’와의 싸움이 재개되면서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가 태풍권으로 빨려들고 있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벌써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수사가 정치 논쟁으로 번지면서 크렘린 내 파벌 싸움이 다시 불붙었다.

이번 검찰 수사 배경을 두고 선거 전략설·권력 투쟁설·과거 청산설 등 온갖 ‘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푸틴 대통령의 국정 통제 능력을 시험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데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지난 7월2일 러시아 굴지의 석유회사 유코스의 대주주인 메나테프 은행의 플라톤 레베데프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러시아 검찰 수사는 한달 이상 이어지고 있다. 수사 불길도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사장과, 이 회사에 합병될 예정된 시브네프티 회사로 번졌다. 게다가 알루미늄 판매 세계 3위인 루스알 회사로까지 옮아붙었다. 옛 소련이 붕괴한 이후 사회적 혼란을 틈타 벼락부자가 된 러시아 재벌들은 또 어디로 불똥이 튈지 전전긍긍하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만일 수사가 더 확대된다면 검찰의 칼날을 비켜갈 재벌은 하나도 없으리라고 전문가들은 관측한다.

검찰 수사의 초점은 국가 재산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 행위에 맞추어져 있다. 레베데프는 1994년 국영 비료회사인 아파티트의 주식 2억8천만 달러어치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레베데프의 배임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이외에 청부 살인·횡령·탈세·불법 주식 거래 등 여러 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시브네프티의 로만 아브라모비치 사장은 세금 포탈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루스알의 올레그 데리파스카 사장은 2001년 인고스트라흐 보험회사·아프토반크 은행·노스트라 철강회사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법 거래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검찰이 올리가르흐들을 수사하게 된 근본 이유는 호도르코프스키의 돌출 행동과 정치적 야심이지만, 발단은 설문 조사였다. 수사가 개시되기 얼마 전 실시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7%가 사유화 결과에 불만을 갖고 있고 이를 재검토할 것을 원했다. 이같은 결과가 나오자 푸틴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에 나섰다. 푸틴 팀인 일명 체키스트에게 정치 스캔들로 비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제 범죄를 척결할 뜻을 비쳤고, 나름으로 푸틴의 의중을 읽은 검찰총장이 유코스를 지목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사건의 실마리인 유코스와 예니세이네프테 가스 회사 간의 불법 주식 거래 사실은, 체키스트 출신들이 창립한 로스네프티라는 또 다른 석유 회사가 제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수사의 의도를 두 가지로 꼽고 있다. 하나는 올리가르흐들이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자본을 국외에 유출하는 것을 막고, 국익을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난 6월 시브네프티의 총수 아브라모비치가 영국 축구 구단 첼시를 인수한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부측은 아브라모비치가 구단 인수 과정에서 시브네프티의 반년치 이익 배당금인 10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을 챙긴 이외에, 유코스와 합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고 의심했다.

수사의 초점이 유코스와 시브네프티에 집중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지난 8월 초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와 가진 회견에서 “시브네프티와의 합병 결정이 검찰의 추적을 받게 된 동기였다”라고 밝혔다.
또 하나 유력한 분석은, 푸틴이 올리가르흐들의 정치적 간섭을 차단하고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3월 대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포석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올리가르흐들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한, 그들의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왔다. 그런데 호도르코프스키는 공개적인 돌출 행동으로 푸틴을 자극했다. 최근 자유주의를 표방한 정당인 야블로코 당과 정의연합당에 정치 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등 푸틴 정당인 러시아통일당을 은근히 압박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나아가 소식통들은 호도르코프스키가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 내 정부’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도 크렘린의 노여움을 샀다고 진단했다.

푸틴 대통령은 국민 정서에 편승해 재벌 때리기의 강도를 조절하고 총선과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 문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태의 수위는 푸틴 대통령의 의도를 넘어서고 있다. 검찰 수사가 정치 파벌 간의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이 주축이 된 푸틴 팀과 1990년대 이후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었던 이른바 옐친 가족 간에 한판 승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칼자루를 쥔 푸틴 팀은 이번 기회에 옐친 가족들을 권력 중심에서 완전히 무력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다. 연방안전국(FSB)의 권한이 강화되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된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연방안전국 국장, 푸틴 팀의 주전 멤버인 이고리 세친 출판부 장관, 블라디미르 우스티노프 검찰총장이 주축이 되어 옐친 가족 진영의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알렉산드르 볼로쉰 크렘린 행정실장·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사장 등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옐친 가족의 대표 격인 카시야노프 총리는 검찰 수사를 ‘상궤를 벗어난 상태’라고 비난하며 호도르코프스키에 대한 지원 사격에 나섰지만, 이는 화를 키우는 결과만 낳았다. 푸틴 팀은 카시야노프 총리를 재벌 비리의 배후 인물이라고 매도하며 그에게 직격탄을 날렸고, 검찰은 카시야노프 총리와 관련된 은행 계좌를 중점 추적했다.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되자 ‘수습할 사람은 대통령뿐’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엘리트 연구로 유명해진 사회학자 올가 크리쉬탄노프스카야는 “대통령이 팔짱을 끼고 관망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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