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악감정 ‘핵폭발’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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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핵기술 절취 사건이 ‘뇌관’ 터뜨려…클린턴 ‘포용 정책’ 치명타 맞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독수리(미국)와 용(중국)이 이른바 ‘핵기술 절취 사건’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새 천년을 코앞에 두고 촉발된 이 싸움이 지속될 경우 아시아에 ‘신냉전’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번 싸움이 시작된 것은 중국이 지난 20년 동안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방법으로 미국의 핵기술을 훔쳐갔다는 ‘콕스 보고서’가 발표된 지난 5월25일 직후다. 중국의 핵기술 절취 사건을 조사해 온 미국 연방 하원 특별위원회(위원장 크리스토퍼 콕스 공화당 의원)가 7백 쪽짜리 진상 보고서를 내놓은 뒤, 미국 여론은 현재 최악의 상태이다. 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한때 꽁꽁 얼어붙었다가 근래 ‘전략적인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녹기 시작한 두 나라 관계가 또다시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의회·언론 ‘중국 때리기’ 난리법석

윌리엄 데일리 미국 상무장관이 콕스 보고서가 공개되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협상이 어렵게 되었다고 실토하는가 하면,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오래 전에 예정된 중국 방문을 취소했다. 게다가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 지도부는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과 재닛 리노 법무장관 사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사 주간지 <타임>과 CNN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미국인 46%가 중국이 미국의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응답한 것도 심상치 않다.

의회와 주요 언론이 ‘중국 때리기’로 난리법석이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최악의 사태를 비켜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중 관계가 얼마 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에 대한 나토 공군기의 오폭 사건으로 얼어붙은 터에, 핵기술 절취 사건으로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는 것만은 막겠다는 것이다. 오폭 사건을 사과하려고 토머스 피커링 국무부 정무담당 차관이 이끄는 미국 정부 대표단이 곧 중국을 방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 문제에 관한 한 세 가지로 나누어 따로따로 취급하겠다는 방침이다. △핵기술 절취 사건 △갈수록 불어나는 무역 적자 △오폭 사건으로 상처받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그것이다. 중국을 보는 여론이 최악인데도 클린턴 대통령이 지난 6월3일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MFN) 자격을 1년 더 연장해 주도록 의회에 요청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핵기술 절취 사건과 관련해 클린턴 대통령은 자극적인 반응을 삼간 채 ‘국가 안보에 대한 기밀 보안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는 현재와 같은 중국 때리기가 중국을 21세기에 전략적 동반자로 삼겠다는 중국 포용 정책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콕스 보고서가 지적한 문제점이 옳은 부분도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군사 기밀 보호와 관련해 적절한 조처를 취했으므로 앞으로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다.

미국 전역을 들쑤신 콕스 보고서의 핵심은 중국이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핵심 핵기술을 훔쳐 이를 무기를 개선하는 데 이용해 왔고, 이같은 절취 행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이 보고서는 중국이 훔쳤다고 알려진 핵기술 일곱 가지 가운데 미국이 개발한 최첨단 잠수함 발사용 W 88 축소형 핵탄두 제조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또 중국이 이 기술을 이용해 미국을 겨냥할 수 있는 지상 발사 이동 핵무기 2종과 잠수함 발사 이동 핵무기 1종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같은 대륙간 탄도탄은 올해 실험을 거쳐 2002년 배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중국이 최첨단 F 117 스텔스 전투기에 사용되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 정보를 노렸을 가능성이 크며, 최신 열핵무기 설계 정보까지 훔쳐 이를 토대로 이미 전략 핵무기를 개발해 실험까지 마쳤다고 단정했다. 심지어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콕스 의원은 5월26일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중국의 핵기술이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었다’라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중국 “미국이 새로운 냉전 촉발하고 있다”

콕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핵기술을 포함한 첨단 무기 기술을 절취한 방법은 대략 네 가지다. 하나는, 핵무기를 연구하는 연구소나 과학자들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벌인 고전적 방법이다. 둘째는, 휴즈나 로럴 등 중국에 위성을 판매한 굴지의 첨단기술 업체들로부터 미사일 유도장치 기술을 넘겨받은 방법이다. 셋째는, 미국 군수업체가 제공한 민간용 기술을 군사용으로 전환해 이용하는 ‘이중적 기술 이용’을 최대한 활용했다. 끝으로, 각종 무기 관련 세미나와 발표 자료, 또는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된 군사 기밀을 모조리 뽑아내는 방법이다.

콕스 보고서가 발표되자 중국 정부는 펄쩍 뛰며 반발하고 나섰다. 관영 신화사 통신과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콕스 보고서가 50년대 횡행했던 매카시즘을 연상하게 한다면서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와 제3 세계 나라를 상대로 새로운 냉전을 촉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관영 매체들은 콕스 보고서 곳곳에 ‘개연성’이나 ‘가능성’과 같은 추측성 표현이 가득하다면서 보고서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미국의 핵기술을 절취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한 채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도 5월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콕스 보고서가 ‘전적으로 터무니없고 근거 없을 뿐 아니라, 숨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주방자오(朱邦造) 외교부 대변인은 이 보고서의 의도가 중국 위협론을 확산하고 반중 감정을 자극하며, 나아가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에 대한 오폭 사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고까지 말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외교적 수사를 쓰지 않고 이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 자체가 험악한 미·중 관계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콕스 보고서가 폭로한 내용이 100% 진실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중국이 핵기밀을 갖고 있는 7개 연구소에서 핵 관련 기밀을 훔쳤다는 사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훔쳐간 핵기밀이 콕스 보고서가 내린 결론대로 위험 수준인지 여부에 대해서 정보 당국조차 갸우뚱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보 당국은 중국이 설령 핵기술을 훔쳐갔다 해도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 정도의 기술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워싱턴 소재 브루킹스 연구소의 중국 문제 전문가인 베이츠 길 박사는 “콕스 보고서의 맹점은 중국의 핵기술 절취 자체를 핵 능력 확보와 동일시한 것이다”라며 그 의미를 축소했다. 또 이번 하원특별위원회 위원인 민주당 노엄 딕스 의원은 최근 <뉴욕 타임스>와 가진 회견에서 ‘문제의 보고서가 핵기밀 관리에 허술한 것으로 드러난 일부 연구소에 대한 개혁을 촉진할 목적 아래 자극적으로 쓰였다’고 밝혔다. 특히 콕스 보고서가 ‘중국의 핵기술이 미국과 대등하다’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사실 콕스 보고서의 진실 여부를 떠나 중국의 핵전력은 기술 수준이나 전반적인 능력 면에서 미국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져 있다. 중국은 미국을 사정권에 둔 대륙간 탄도 미사일 20기, 중거리 탄도 미사일 백기, 단거리 미사일 4기, 그리고 잠수함 발사용 탄도 미사일 24기를 갖고 있는데, 이 정도 규모는 미국의 핵전력에 비하면 300분의 1 수준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핵추진 항공모함 11척과 전략 폭격기 1백74대를 가진 미국에 비해 중국은 항공모함이나 전략 폭격기를 보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중국이 군비 측면에서 미국을 뒤쫓으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항간에는 바로 이런 현저한 군사력 격차를 좁히기 위해 중국 군부가 내밀히 미국 핵기술을 절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핵기술 절취 사건으로 미국에서 반중 정서가 급속히 퍼져가고 있고, 그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 포용 정책이 흔들릴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핵기술 절취 사건으로 중국 포용 정책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콕스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리처드 아미 하원 원내총무와 트렌트 로트 상원 원내총무를 비롯한 공화당 지도부는 중국의 핵기술 절취 사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과 재닛 리노 법무장관을 사임시키라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이들은 중국 정부의 스파이 행위가 카터·레이건·부시 대통령 때도 있었지만 현정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며,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 포용 정책에만 연연한 나머지 고의적으로 사안의 중대성을 축소했다고 비난했다.미·중 관계 냉기류 오래갈 듯

이처럼 공화당 지도부의 포격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내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점쳐지고 있는 공화당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도 중국을 맹공격하고 나섰다. 그는 중국이 미국의 파트너가 아니라 경쟁자라면서,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 정책은 실패작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핵기술 절취 사건으로 전전긍긍하는 집단이 또 있다. 중국에 진출한 미국 첨단업체들이다. 콕스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의회가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처를 더욱 강화하라고 촉구했기 때문이다. 콕스 보고서는 로럴과 휴즈 등 위성 제작사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캘리포니아와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중국 첩보기관과 연계된 ‘전위 회사’가 무려 3천 개에 이른다고 폭로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고성능 컴퓨터 칩·공작기계 수출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건의 사항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일단 콕스 보고서가 제시한 권고안의 38개 항 대부분에 동감하고 폭넓은 기밀 보호 조처를 발동할 태세다. 이 권고안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크게 네 가지다. △주요 핵관련 연구소의 기밀 보호를 강화한다 △민감한 기술 이전과 관련해 정부기관이 책임진다 △외국에서 위성을 발사할 경우 민간업체가 아닌 국방부가 책임진다 △미국의 국익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기술 이전과 관련해 새로운 국제통제협약을 추진한다.

그러나 업계의 반응은 정반대다. 중국이 최근 들어 시장 개방에 적극 나서는 상황에서 행정부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수출 규제 조처를 취할 경우 실효성도 없는데다 수출 시장을 일본과 유럽에 내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6개월 동안 중국과 1억8천만 달러가 넘는 계약을 체결한 노텔 네트워크 사는 ‘중국과의 비현실적이고도 불필요한 긴장 관계를 일으킬 행정부의 과잉 조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고, 인텔도 ‘콕스 보고서가 제시한 수출 규제 권고 사항은 시장 경향을 감안해 신중하게 채택해야 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과 홍콩의 칩 시장 규모는 올해 80억 달러로, 전세계 시장의 5%에 이른다.

미국 정부의 대외 정책은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때문에 중국의 핵기술 절취 사건으로 의회에서 지지 기반을 잃은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 포용 정책은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때마침 의회의 중진급 의원 4명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반대를 촉구한 서한을 보냈는데, 여기에는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제시 헬름스 의원과 민주당 소속 러셀 페인골드 의원도 포함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트렌트 로트 상원 원내총무도 국가 기밀에 대한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권한을 대폭 확대한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뛰고 있다.

공화당은 벌써부터 중국의 핵기술 절취 사건을 내년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삼을 태세다. 일부에서는 공화당이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핵기술 절취 문제를 너무 당리당략으로 몰아가지 않느냐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도 콕스 보고서 내용의 많은 부분을 시인한 만큼, 뭔가 극적인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 한 이번 핵기술 절취 사건의 여진으로 미·중 관계는 상당 기간 얼어붙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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