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서해 5도 수역 넘보나
  • 崔寧宰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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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전략적 가치·황금 어장 확보, 중국 교통로 장악 노려… 북방한계선은 논란거리
서해 5도 경계선 문제는 53년 휴전협정 무렵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육지 군사분계선은 휴전 당시의 군사 접촉선을 기준으로 설정했다. 그것이 비무장지대를 둘러싼 군사분계선이다. 그러나 당시 해상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거의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원칙대로 하면 교섭할 필요도 없이 한반도의 거의 모든 섬이 한국 차지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반도 북쪽 섬은 현실적으로 방어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북한에 양보했다. 휴전 협정에서 정한 해양 경계선 확정 원칙은 ‘육지나 섬을 기초로 그 인접 수역과 6·25 전에 어느 편 관할 아래 있었는지를 존중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해도·경기도 경계선의 서쪽과 북쪽에 있는 섬 중 5개는 한국에, 나머지는 북한에 귀속시켰다.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38도선 이남이어서 한국전쟁 전에도, 휴전 협상 때에도 한국 주민이 살았다. 그래서 이곳까지 한국 영토로 정한 것이다. 이것이 53년 휴전협정 2조 13항 b조이다.

그런데 해상 경계선이 문제였다. 서해 38도선 바로 아래 북한 영역인 연안반도·해주만·옹진반도·대동만과 서해 5도 사이는 짧게는 4.6㎞에서 길게는 19㎞밖에 안된다. 수역 너비가 평균 10해리가 안되는 것이다. 당시에도 북한은 황해도에서 직선 기선 기준 12해리를 주장했다. 이럴 경우 백령도를 넘게 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서해 5도와 황해도의 중간을 연결한 선을 경계선으로 정했다. 이것이 바로 북방한계선(NLL)이다. 문제가 된 완충 지역(지도 참조)은 북한과의 충돌을 자제하자고 한국이 자의로 설정한 선이다. 그래서 북한과 협상할 개념은 아니다. 북한은 이후 20여 년 동안 매일 경비정을 이 선 근처까지 보냈지만 단 하루도 북방한계선 밑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다. 이는 북한이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이며 ‘응고의 원칙’에 따라 관습법을 형성하기에도 충분하다. 73년 10월에 와서 북한은 해군력에 자신이 붙은 데다, 유엔에서 제 3차 해양법 회의가 열리는 것을 계기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10월부터 12월까지 43회나 침범해 긴장을 높였다. 당시 유엔 해양법 회의에서는 영해 12마일을 다루고 있었다. 북한 주장은 서해 5개 섬만이 유엔사 관할이고 그 주변 수역은 황해도와 경기도 경계선을 서쪽으로 연장한 선보다 북쪽에 있으므로 북한 영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선박이 서해 5개 섬 수역을 출입하려면 북한으로부터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 해군 함정들은 계속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인천에서 백령도로 가는 우리 해상 교통로를 막았다. 한국 해군은 민간 선박을 호송하며 북한 해군 함정을 박치기로 들이받기도 하면서 이 해역을 지켰다. 한국 해군이 강경하게 대응하자 북한은 더 도발하지 않았다. 75년에도 같은 사례가 있었으나 우리측이 대응하자 북한은 도발을 멈추었다. 76년 이후 20여 년 동안 북한은 비교적 충실히 이 북방한계선을 지켰다.

남북한은 92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서해 5도 수역 해상 경계선 문제에 대해 못을 박았다. 92년 2월19일 발효된 남북 기본합의서 제2장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53년 7월27일자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이후에도 서해 5도 경계선과 관련해서 계속 트집을 잡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부속 합의서 조항이다. 같은 해 9월17일에 발효된 부속 합의서 제 3장 10조는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고려대 법대 유병화 학장(국제법)은 “휴전협정 체결 당시 원칙과, 그 뒤의 관행, 92년 남북 기본합의서 조문을 보더라도 서해의 북방한계선은 명백히 합법적이다. 북한은 생트집을 잡고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 수역이 한국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이미 분쟁 수역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과 다시 협상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백령도·대청도·소청도 사이와 연평도·우도 사이 해역에는 한국측 섬이 없다. 그래서 이 사이의 경계선은 유엔 해양법 정신(12해리)과 휴전협정 정신(북방한계선) 가운데 어느 것을 따를지 애매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 수역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군사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이 수역은 한국군이 서해 5도만을 위한 국지전 개념의 별도 ‘작전 계획’을 운용할 정도로 가치가 높다. 국방부는 73년 10월 북한이 북방한계선을 부정하고 도발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계획을 세워 지금까지 계속 이를 수정·보완하고 있다.

이 수역을 열어주면 남포 사령부를 빠져나온 북한 해군의 대형 함정들이 자유롭게 완충 지역을 통해 장산곶·사곶·해주에 있는 북한 군항을 드나들 수 있다. 지금까지 북한 해군은 해안선이 지척이어서 수심이 얕은 북방한계선 안쪽으로만 이동했기 때문에, 큰 배는 움직이기 힘들었고 작전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또 완충 지역을 열어주면 백령도 주위 세 섬이 고립된다. 그러면 서해 3도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떨어진다.

백령도는 인천항에서는 1백80㎞나 떨어져 있지만 북한 장산곶에서는 17㎞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한국군 최정예 전략기동부대인 해병대가 있다. 이들은 상륙 작전을 위해 존재하는 부대이다. 유사시에는 곧바로 평양을 공격할 수 있다. 북한에 평양방어사령부가 있고 그 예하에 정예 군단 여러 개가 있는 것도 상당 부분 서해 3도의 해병대 때문이다. 또 백령도에는 레이더 기지가 있어 서해안을 드나드는 북한 함정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수도권이 위협받는다. 서해 교전, 남북 관계에 큰 영향 주지 않을 듯

중국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서도 이 해역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인 가치도 대단히 높다. 이 해역은 조기·홍어(한국 어획량의 절반 이상)·꽃게·새우가 많이 나는 황금 어장이다. 북한이 이 해역에서 줄곧 도발하는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는 이번 사건이 남북 관계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고 분석한다. 남북한이 해상 경계선 문제로 교전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비단 서해 5도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함정이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례도 있다. 66년 1월 동해에서 일어난 ‘56함 사건’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그 해 명태잡이 철에 한국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북상하던 한국 해군의 1000t급 초계함 56함을 해안포로 쏘아 침몰시켰다. 당시 북한은 56함이 동해의 북방한계선을 7㎞나 넘어 북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북방한계선 상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태의 앙금이 남아 있던 남북한 해군은 67년 봄 서해에서 교전한 적도 있다. 조기잡이 철인 3∼5월에 한국 어선 2천여 척과 북한 어선 천여 척이 서해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조업하고 있었다. 남북한 군함들은 그 사이에 끼어서 어선을 보호하며 맞서고 있었다. 그러다 충돌이 빚어져 함포까지 동원해 교전했다.

그래서 이번 교전 사태는 이런 류의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현안인 이산 가족 상봉·금강산 관광 사업·차관급 회담 등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가령 이산가족 문제는 서해 교전과는 별개 변수로 진행되는 사안이다. 한국 정부는 이를 인도주의 문제로 본다. 그러나 북한 정서는 다르다.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전문가들은 당장은 시범 방문단을 교환하거나 연락소를 설치하는 수준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은 이 사업을 통해 당장 손에 쥐는 외화가 있다. 그래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국방연구원 서주석 박사는 “남북 관계는 서해 교전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도 북한 체제 내부의 제동 장치 때문에 서서히 굴러가게 되어 있다. 또 북한이 한국 군함을 향해 미사일을 쏜다 하더라도 서해의 문제 수역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햇볕 정책을 철회해야 한다는 등 호들갑을 떨며 과잉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북한 포용 정책을 펴는 한국 정부는 서해 사태 직후 신중하게 대응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6월15일 10시께 고촉동 싱가포르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던 중 황원탁 외교안보수석한테서 최초 교전 사실을 보고받았다. 김대통령은 곧바로 회담을 3분 정도 끊고 황수석에게 △원칙대로 강력히 대응하되, 확전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응할 것 △선제 공격을 하지 말 것 △한반도 주변국에 이 상황을 신속히 설명하되, 특히 러시아에 자세히 설명할 것 등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사태가 더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태 발생 며칠 뒤 북한 방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문제를 확대하지 말라고 발언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서해 사태는 더 확대되지 않고 마무리되어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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