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따돌림 당한 버마 망명정부의 희망
  • 金鎭華 편집위원 ()
  • 승인 1999.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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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버마 민주화 전략회의’ 보도 안해… 외무부 관리, 접촉 기피
미얀마 군부의 강자 네윈 원수가 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한때 평화스럽고 부유했던 불교 국가 미얀마는 오늘날 세계 최장의 군사 정부 통치를 받고 있다.

88년 8월8일. 이 날은 미얀마 국민들에게 이 숫자만큼이나 묘한 날이다. 오랜 군사 독재에 지친 국민들은 그 전 해에 있었던 한국의 시민 항쟁에 고무된 듯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낸 시민 항쟁에 놀란 군부는 90년 다당제 총선거를 실시했다. ‘군대식 질서 회복’에 자신감을 얻은 군부는 내심 총선 승리를 자신하며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치렀다.

결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실상의 군부 정당인 국민단결당(NUP)은 5%를 얻었고,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연맹당(NLD)이 82%를 얻어 군부를 완전 KO시켰다. 군부는 외세 간섭과 사회 혼란을 핑계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거 자체를 ‘없었던 일’로 간단히 처리했다.

국민들은 즉각 반대에 나섰다. 아웅산 수지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전후해 미얀마의 반군부 민주화운동은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 정부에 맹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군부는 철저히 완력으로 밀어붙였다. 총선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민주화운동과 국제적 관심은 서서히 위축되어 갔다.

“세계가 버마를 잊었나 봅니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NGO 전략회의.’ 지난 6월 말 서울에서 열린 이 회의는, 이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아·태 민주지도자회의가 소집한 국제 회의였다. 세계 각국 비정부기구(NGO) 대표 30여명은 한국 언론의 철저한 ‘무시’ 속에 이틀 동안 조용히 만났다가 조용히 헤어졌다. 그중에는 ‘버마 망명 정부’ 총리 세인 윈 박사(56)도 있었다.

그는 서울의 한 B급 호텔 싱글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한국을 떠났다. 이 망명객은 미얀마 사람 특유의 잔잔한 미소와 낮은 목소리로 조국의 장래에 관해 탄식조로 말문을 열었다. “세계는 버마를 잊었나 보군요. 지구상 독재 국가 중에 버마처럼 폭압적이고 거친 군사 독재가 그토록 오래 지속되는 국가도 있을까요. 앞날이 캄캄하군요.”

세인 윈 총리는 미얀마를 내내 버마라고 불렀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군부가 국민과 상의도 없이, 국민 투표도 없이 계엄령 하에서 국호를 미얀마로,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바꾸었으니 이런 비민주적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버마 망명 정부의 총리는 밤새도록 항공 여행에 시달려서인지 눈가에 피로와 외로움이 고여 있었고, 그의 작은 체구는 큰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는 강철 실처럼 팽팽했다. 버마의 민주화는 이제 물 건너간 것 아닌가?

정치가 질식 상태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국의 대학은 3년째 문을 닫고 일부 고교마저 휴교했다. 군은 야당(NLD) 지도부를 모두 체포·감금·연금하고 어떤 반정부 집회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화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언제 불씨가 당겨질지 모른다. 버마에는 1백30여 소수 민족이 있어 힘으로만 다스리기 어렵다. 국민성도 예측하기 힘든 면이 있어, 끝내 참다가 터질 때는 실로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지구상에 대학 교육을 포기한 정부가 또 어디 있는가. 정보화 시대에 개인이 컴퓨터나 팩시밀리를 갖는 것조차 정부에 신고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만큼 통치에 자신 없는 군부 독재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당이 분열되고, 지도부가 구금되고, 학생들조차 모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효과적 저항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아·태 민주지도자회의 의장 한승주 교수가 한 말처럼, 큰 얼음덩이를 깨는 데는 망치를 사용할 수도 있으나 작은 바늘로 구멍을 내서 깰 수도 있다. 망명 정부는 바늘 구실을 하고 있다.

망명 정부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는 비난도 있는데….

군사 정부의 모략이다. 버마 문제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개입할 성질이 아니다. 망명 정부는 미국 의회가 책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기금’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직원 6∼7명과 자원 봉사자들이 살림을 꾸리고 있다. 유엔에 대표도 파견하고 태국-버마 국경과 인도-버마 국경 지대에 대표를 파견해 소수 민족들과의 연대도 꾀하고 있다. 국경 산악 지대의 반군 세력들도 지원하고 있다.

화제가 무장 투쟁에 이르자, 한때 ‘얌전한’ 수학 교수였던 그의 눈은 긴장되고 지금껏 차분하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는 90∼93년 카렌족이 지배하던 국경 지대 마나풀로 지방에서 무장 게릴라들을 지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현재 군부가 점령하고 있으나, 카렌민족연맹 소속 무장 세력들은 산악 지대로 이동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학생·노동자·농부·무직자 등 ‘수천명’이 국경을 따라 이곳 저곳에서 정부군을 괴롭히고 있다. 버마는 인도·라오스·태국·중국·방글라데시 등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소수 민족이 많다. 이들을 어떻게 힘으로 통제하겠는가. 소수 민족을 포용하는 화해와 단합의 정치가 살길이다. 그 때문에 우리 정부의 공식 명칭도 버마국민단합연합정부(NCGUB)이다.”

세인 윈 총리를 따라 서울에 온 망명객 중에는 반정부 학생 지도자 아웅투 니에인(34)이 있다. 그는 랑군 대학에 다닐 때 반정부 폭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지방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탈출에 성공해 현재는 버마전국학생민주전선(ABSDF) 총비서로 있다. 태국 국경 지대 마에훈손 주의 마에사랑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세력을 지휘하고 있는 그는 깡마른 체격과 반짝이는 눈,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무장 투쟁이 시련에 부닥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전략은 장기전이다. 전국적으로 비밀 학생 연락망을 유지하면서 조직이 와해되지 않도록 유지하고, 중소 도시에서 학생·시민·노동자를 규합해 국경 지대로 보내 무장 투쟁을 훈련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수도 랑군에 잠입한 적이 있는가?

‘얼마 전’ 랑군에 갔었다. 수도는 겉으로 조용하나 물밑은 긴장 상태였다. 학생들은 욕구 불만과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학생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서성거리거나 친구를 만나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외국으로 나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희망이다. 잔인한 얘기 같지만 이같은 상황이 학생운동에는 오히려 다행인지 모른다. 최악의 경제 상태와 할일 없는 젊은이들의 불만이 합쳐져 언젠가 폭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학생 반군 세력의 규모는?

샨주와 카렌 주에 약 2천명이 있다. 이들 모두가 학생은 아니다. 학생 출신이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 적은 인원으로 40만 정부군을 어떻게 물리치나?

무력 대력에서 승리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항 정신의 불씨를 살려, 우리가 영원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보여줘야 한다. 국내 중소 도시 어느 곳에도 연락망은 있다. 특히 15∼18세 고등학생들의 조직 활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군인들의 사기는 최악이다. 월급을 못받아 지난 10년간 군인 10만명이 탈영했다.

외국 학생운동 세력과도 연대한다는데 성과가 있는가?

아시아학생연합·국제학생연맹 등 세계 40개국의 학생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의 자유버마연맹이라는 학생 단체와 연대해, 펩시콜라 사가 버마에 콜라 공장 짓는 것을 저지했다.

니에인은 서울회의 뒤에도 사흘간 한국에 머무르며 학생운동 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1세기진보학생연합(대표 김동규)과 인권운동사랑방의 서준식씨를 만났다고 시인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는 버마 사람이 천여 명 머무르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체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 한달에 두세 차례 친선 모임을 갖고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돕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한다. 이 모임과 버마전국학생민주전선과의 연락은, NLD 출신으로 한국에 일자리를 찾아 왔다는 랑군 대학 출신 모모우 씨(35·가명)가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 정국에는 대화라는 단어가 없다. 군부는 아웅산 수지가 현실을 무시한 채 민주주의라는 원칙만을 되풀이한다고 비난한다. 야당은 군부가 야당과 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인 윈 총리는 군부 장성 중 대학을 나온 자가 2명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의 수준이 낮다고 비난하면서, “군부와의 대화가 어떻게 되든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자유 민주 선거이다”라고 못박았다.

군사 정부가 국내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인 마약왕 쿤사를 항복시키는 등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인정하는 국민도 많다는데….

쿤사가 투항했지만 그 아들을 통해 마약 밀수를 계속하고 있다. 마약 사업은 군부의 묵인 또는 협조 없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군은 마약 사업으로 군자금을 얻고 있으며, 쿤사는 장성들이 사는 지역의 호화 별장에서 살고 있다. 버마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97 달러밖에 안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미국·프랑스와 전쟁을 30년 이상 치른 베트남도 3백 달러이다. 37년 군사 독재의 결과가 이 정도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세계는 알아야 한다.”

세인 윈 총리는 인터뷰 내내 국제 사회의 몰이해와 미지근한 태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버마 민주화를 위한 전략회의에서는 ‘새로운’ 전략들이 제시되었지만 이 내용을 보도한 한국 언론은 없었다. 회의 말미에 예정된 기자회견도 취소되었다. 회견장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언론, 철저히 외면

고독한 망명객 세인 윈 총리는 버마와 비슷한 경험을 불과 몇년 전에 경험한 한국 언론의 철저한 외면에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는 단 한 사람의 한국 관리도 만나지 못했다. 민주지도자회의가 김대중 대통령(당시 야당 총재)과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 대통령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웅산 수지와 그의 NLD가 언젠가는 집권할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외무부의 어느 직원도 비공식으로나마 그를 접촉하지 않았다.

이같은 한국의 태도에 실망한 ‘노르웨이 버마위원회’ 클뢰시 의장(전 유니세프 주한 대표)은 외무부로 친구를 찾아가 이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 외무부가 망명 정부를 인정하든 안하든 관계 없이, 회의에 참석한 ‘총리’를 비공식으로 만나는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김대통령은 아웅산 수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인 윈 총리는 김대통령이 야당 시절에 버마 민주화운동에 보여준 지원에 늘 감사하며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입장을 이해한다고도 했다. “세계 어디에서나 독재와의 싸움, 특히 군사 독재와의 싸움은 외롭고 긴 싸움입니다. 지난 10년의 망명 생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이 더 걸릴지도 모르죠.” 그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서울에서의 1박을 끝내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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