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레슬러 출신 주지사 제시 벤추라의 야망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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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개혁당 소속 제시 벤추라, 민주·공화 양당 제도에 도전
미국 사회는 요즘 프로 레슬러 출신인 한 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있다. 주인공은 지난해 11월 의회 중간 선거에서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미네소타 주지사에 당선된 제시 벤추라(47). 2백년 넘게 공화·민주 양당 제도가 뿌리 내린 미국 정치판에서 제3 정당 후보가 발을 붙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 때문에 그가 ‘상식이 통하는 정치를 하겠다’며 주지사 선거에 나섰을 때만 해도 그의 당선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키 193㎝에 몸무게가 118㎏이나 나가는 이 전직 프로 레슬러가 당선되자 워싱턴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자연히 이 정치 문외한이 당선된 것을 놓고 갑론을박이 적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그의 당선이 정치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혹평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통해 신선한 정치 바람이 불기를 기대했다.

이처럼 새 바람을 몰고온 벤추라가 지난 1월 초 주지사에 취임한 지 7개월이 지나면서 흥미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주지사 직무 평가도가 70%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로 호의적이다. 게다가 매스컴도 광적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좇는다. 근래 들어 CNN·폭스·NBC를 비롯해 전국 네트워크를 가진 텔레비전들이 다투어 그를 토크쇼에 초대하는가 하면, 그가 최근 펴낸 자서전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 돈방석에 올랐다.

대통령 선거 출마설 무성

그런 그가 지난 7월25일 또다시 미국민의 눈길을 모았다. 올해로 창당 4년째인 개혁당 전당대회에서 그가 미는 후보가 현직 당수 로스 페로가 미는 후보를 두 배 차로 누르고 개혁당 의장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텍사스 주 출신 억만장자 페로는 92년과 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지만, 개혁당 자금줄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페로가 미는 패트리셔 벤저민 부총재를 벤추라가 미는 잭 가건이 거뜬하게 누른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벤추라의 영향력이 현실화하자, 벌써부터 미국 정가에서는 그가 앞으로 정치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대통령 선거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물론 벤추라 본인은 이에 대해 한사코 부인한다. 그는 전당대회가 끝난 뒤 NBC 방송에 나와 2000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 입장을 밝힌 데 이어 7월28일 CNN에 출연해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일단 주지사에 당선된 만큼 임기가 끝나는 2004년까지 현직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4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특히 폭스 텔레비전에 출연해 “선거 자금 개혁과 같은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서라도, 개혁당과 같은 제3의 정당이 필요하다”라고 말하고, 개혁당이 공화·민주 양당에 대한 대안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물론 미국내 정치 분석가들은 벤추라의 이같은 호언에 회의적이다. 미국 역사와 뿌리를 같이하는 공화·민주 양당에 비해 개혁당은 창당한 지 4년밖에 안된 군소 정당인데다 지지 기반도 약하기 때문이다. 50개 주 가운데 개혁당 지부가 있는 곳은 고작 19곳이다. 그나마 개혁당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계기도 개혁당 간판으로 두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한 로스 페로라는 억만장자를 통해서였다. 또 벤추라가 새 바람을 일으키며 미네소타 주지사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그의 힘으로 양당 정치의 거대한 뿌리를 뒤흔들기는 어림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다.

사실 개혁당은 벤추라라는 신선하고도 영향력 있는 정치 신인말고는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인물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과거 페로 후보가 ‘균형 예산’ ‘보호무역주의’ ‘반이민 정책’ 등을 정강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미 공화·민주 양당에서 내로라 하는 후보들이 2000년 백악관 고지를 향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지만, 개혁당은 후보조차 뽑지 못했다. 이번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페로는 전당대회 대의원들이 외면함으로써 개혁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이 때문에 개혁당 대의원들은 원외의 제3 인물을 고르고 있는데,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벌써 서넛이나 일반의 입에 오르고 있다. 그 중에는 콜린 파월 전 합참의장, 극우 보수주의자인 팻 뷰캐넌, 부동산 거부인 도널드 트럼프, 코네티컷 주지사를 지낸 로웰 와이커가 포함되어 있다. 벤추라는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와이커 전 지사에게 마음이 쏠려 있으나, 여의치 않을 경우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 의사를 밝힌 존 매케인 의원을 영입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인 정치 자금 일절 안받아

내년 대선에 후보를 내느냐 마느냐 여부는 인물 못지 않게 선거 자금이 얼마나 풍부한가도 관건인데, 그 점에서 개혁당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개혁당은 아직 대통령 후보를 정하지 못해 일반에게서 선거 자금으로 거둔 것이 한푼도 없다. 그나마 유일한 자금이라면 96년 대선 때 페로 후보가 유효 득표의 8%를 획득한 덕분에 연방선거위원회로부터 받게 될 1천2백60만 달러가 전부다(유효 득표 5% 이상이면 국고 보조금을 지급하게 되어 있음). 따라서 개혁당 물주인 페로가 자기 당 대통령 후보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지 않는 한, 개혁당은 공화·민주 양당의 막대한 자금력 앞에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반 유권자들의 반응인데, 아직은 개혁당 후보에 대해 미온적이다.

이처럼 척박한 정치 환경에서 앞으로 벤추라가 중심이 될 개혁당이 과연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아직은 회의적이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미네소타 주 행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여론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정치 분석가들의 전망이다.

실례로 한때 알코올 중독자로서 패가 망신할 뻔한 조지 부시 2세가 지금처럼 공화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것은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 덕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텍사스 주 행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벤추라가 ‘상식의 정치’를 표방하며 나름으로 좋은 정치를 펼칠 경우 제2의 조지 부시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벤추라는 지난 1월 주지사에 취임한 뒤 다소 기이한 처신을 해 화제를 뿌렸다. ‘정직’을 자신의 간판 이미지로 내세운 그는 개인적인 정치 자금을 일절 받지 않을 뿐더러, 이익 집단의 로비스트와는 상종조차 하지 않는다. 미국 정치가 특정 이해 집단의 입김에 휘말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11월 선거 때도 프로 레슬러 시절 자신의 로고와 구호가 담긴 기념품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선거 자금을 조달했다. 당시 그는 단돈 6백 달러를 들여 개설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을 알림으로써 젊은 유권자들을 끌어모았다. 말하자면 돈잔치로 얼룩진 공화·민주 선거판을 철저히 외면하고도 거뜬히 당선된 것이다.

벤추라 자신은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주의자’임을 내세운다. 때문에 국민에게 유리한 것이라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어느 당과도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실제로 그는 주 내각을 정파를 초월한 인사로 메웠는가 하면, 주의회에서 공화·민주 양당이 팽팽히 맞설 때는 양당 대표를 불러 타협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혁당 출신으로는 유일한 주지사인 벤추라의 앞길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활약을 기대하기는 힘들게 되었지만, 2004년 대선 때 돌풍을 일으킬 수 있을지 벌써부터 미국민들의 관심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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