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식 해법에 ‘파도타기’하라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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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한과 직접 대화 이뤄지면 ‘핵 포기 보상’ 약속할 듯
오는 9월 열리는 4차 6자 회담과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부시 행정부의 북한 정책 구상이 선명해졌다. 리비아 식으로 핵 문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리비아식 해법은 대량살상무기를 소유한 국가가 이를 먼저 고백하고 사찰을 받는 대신 미국은 다양한 인센티브를 지불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2월의 2차 6자 회담 직전부터 표면에 등장한 이래 최근 들어 더 포괄적이고 정교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 7월8일 라이스 보좌관의 방한과 21일 존 볼턴 미국 국무부 군축및국제안보 담당 차관의 방한은 각각 리비아식 해법의 총론과 각론에 대한 설명회였다고 할 수 있다. 라이스 보좌관이 총론을 말했다면, 볼턴 차관은 ‘11월 대선까지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부시 정부의 데드라인을 제시했다.

부시 행정부의 리비아식 해법과 관련해 지금까지 드러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첫 단계로 환경 조성. 최근 두드러진 움직임은 CVID (철저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와 고농축우라늄(HEU) 문제에 대한 자세 변화이다. 6월 말 3차 6자 회담에서 CVID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데 이어, 최근에는 고농축우라늄에 대해서도 언급을 삼가고 있다.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에 동의한다면 굳이 CVID와 고농축우라늄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 역시 변화한 모습이다(<시사저널> 제770호 참조). 한국 정부 관계자는 북·미 직접 대화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였으나, 7월22일자 아사히 신분이 북한과 미국이 무릎을 맞대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6자 회담 북한측 차석대표인 리 근 외무성 부국장과 조 디트러니 미국 국무부 북한담당 특사가 오는 8월 미국 민간단체가 주최하는 전미외교정책회의(NCAFP)에 동시 참석한다는 것이다. 외양이야 어떻든 양측의 고위실무 대표자들이 리비아식 해법을 둘러싸고 직접 담판을 벌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북한은 겉으로는 ‘우리는 리비아와 다르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왜 미국은 리비아와 달리 우리와는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가’라며 불만을 토로해 왔다. 지난 7월13일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도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이같은 불만을 토로했다. 부시 행정부가 직접 만나자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한은 특히 부시 행정부가 CVID와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전제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면 대화에 응하겠다는 태도다.

북·미 직접 대화가 이루어지면 북의 핵 포기와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보상이 초점이 될 것이다. 현재까지 부시 행정부가 꺼낸 카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테러지원국 해제이고, 또 하나는 경제 지원이다. 전자는 미국이 결정할 사안이고, 후자는 주변국들과 보조를 맞추겠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라이스 보좌관의 한·중·일 순방과 7월21~22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의 의미가 드러난다.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받아들이면 한국의 포괄적 남북경협과 일본과 수교 및 100억 달러에 이르는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한·일 정상의 발언을 통해 확인시켜준 것이다. 한·일 정상회담이 있던 7월21일, 존 볼턴이 방한해 리비아식 해법을 오버랩한 것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최근 미국은 특히 일본에게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하는 적극적 역할을 해주기를 주문했다. 일본 역시 일정한 외교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활용할 태세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7월 참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고이즈미 총리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 전에는 북한의 협조가 필요해 일본이 양보했지만 이제는 북한이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차례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 역시 일본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입장이 아니냐는 태도이다.

일본의 적극적 역할이 긴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동북아 정세를 고려할 때 그것은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도 마냥 여유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이완 독립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타이완 간의 긴장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국 인민일보사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7월12일자)의 분석에 따르면, 타이완 해협을 ‘경제·군사적 생명선’으로 간주하는 일본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타이완 해협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환구시보>의 분석이 맞다면, 앞으로 일본의 안보적 관심은 타이완 해협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배후를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핵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이 일본의 국가 이익이기도 한 것이다. 더군다나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과 노무현 대통령의 9월 방러를 계기로 러시아 세력이 일본의 옆구리와 후미까지 내려올 것을 생각하면 마냥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의 리비아식 해법은 미국 대선 전과 후, 두 단계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핵 포기를 선언하고 이에 대한 검증 방법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테러지원국에서 명단을 삭제하고 경제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대선 전에 1단계 합의를 이룰 수 있다. 문제는 부시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시가 재선되면 리비아식 해법이 내포한 함정이 다시 전면에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부시 행정부가 최근 CVID와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뒤로 물리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리비아식 해법 그 자체가 이미 철저한 핵문제 해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CVID이고, 또 CVID를 추구하다 보면 고농축우라늄 문제는 당연히 거론될 수밖에 없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둔 것이다. 재집권 후 정치적 부담이 없어지면 북한과의 핵 검증 과정에서 언제든 다시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타이완 해협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에서 미국은 일본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둘 다 적극 개입이라는 면에서는 공조하지만 한반도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 일본이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한다면 미국은 타이완과 한반도라는 두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핵문제는 또다시 표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함정이 있다 해도 현재의 국면은 남이나 북이나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편승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의 북한 접근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지지 세력을 넓힐 필요가 있다.

동시에 유사시 대세를 굳히기 위한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그 하나는 앞으로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국의 의사에 반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지속적으로 대미 외교 수단을 축적해 가야 한다. 이런 기반 위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의 대세를 굳혀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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