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 전엔 부계 사회 없었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7.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종서 박사, 친족 용어 분석 통해 조선 시대 혈연 의식 분석
우선 퀴즈부터 시작하자. 소설 <홍길동전>을 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고뇌가 그려진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15세기 중반. 당시 홍길동에게 고모나 이모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홍길동은 이들을 어떻게 불러야 했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정답은 ‘숙모’다. 당시에는 ‘고모’나 ‘이모’라는 호칭이 아예 없었고, 부모의 여자 형제는 모두 숙모라고 불렀다. 대신 요즘 숙모라고 불리는 삼촌의 부인은 말 그대로 ‘숙처(叔妻)’라고 했다.

‘백부’ ‘숙부’와 ‘외숙부’의 경우도 모두 ‘숙부’로 통일해서 불렀다. 그럼 ‘친사촌’ ‘이종사촌’ ‘고종사촌’ ‘외사촌’은? 역시 ‘사촌’이라는 단일 호칭밖에 없었다. 아래 세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사회에서 조카는 생(甥; 남자 형제의 아들)과 질(姪; 여자 형제의 아들)로 구분되지만 당시에는 ‘아아’ 혹은 ‘삼촌질(三寸姪)’이라는 말로 함께 아울렀다.

이상은 14~16세기 조선에서 불렸던, 지금과 다른 친족 호칭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원리는 간단하다.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호칭들이 퍼져나간다. 나와의 혈연적 원근이 중요시되었을 뿐 부계와 모계는 전혀 차별이 없었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종서 박사(36)는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4~16세기 한국의 친족 용어와 일상 친족 관계’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리고 이 중 일부를 최근 발간된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63호)에 발표했다.

역사학자인 이씨가 당시의 한자어와 이두문을 뒤적이며 친족 용어를 연구한 본뜻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에는 각종 권리 의무 관계가 혈연을 중심으로 나타나며, 혈연이 아닌 사람은 권리 의무 관계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점을 실증하기 위해서’였다. 논문은 그런 방식의 세계가 왜 구축되었는가를 친족 용어를 통해서 풀어보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모든 권리 의무 관계는 혈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처족(妻族)은 이 관계에 끼지 못했다.

예를 들어 14~16세기 조선에서는 남편이 죽었을 때 부인은 남편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단지 점유만 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식이 없을 경우 남편의 재산은 남편의 혈연인 조카에게 돌아갔다. 여기서 조카란 앞서 살폈듯이 질(姪), 즉 누이의 아들까지 포함한 조카다.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부인이 죽었을 경우에도 부인의 재산은 비혈연 관계인 남편이 아니라 부인의 조카, 다시 말해 여자의 혈연에게 돌아갔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아들과 딸이 차별 없이 똑같이 상속받았다는 것은 이미 1970년대 최재석 박사(고려대 명예교수)의 연구로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최교수의 연구는 현상 발굴 차원에 머물렀을 뿐, 당시 세계관과 부계 의식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따라서 이씨의 연구는 당시 사회에 부계 의식이 아예 없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 발짝 진전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4~16세기 조선은 고모와 이모, 생과 질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사회였다. 중요한 것은 호칭뿐 아니라 재산 관계에서도 친가·외가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나’는 두 할아버지의 손자이며, 그분들에게서 내가 받을 수 있는 권리나 의무도 같았다. 다시 말해 인간 관계가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였다.”

이런 점은 당시 사회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부계 사회는 권리 의무 관계, 즉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가 단선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다. 집안으로부터 쫓겨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부계 쪽의 편에 서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혈연 의식이 방사형으로 퍼져 있을 경우, ‘나’는 외삼촌과 친할 수도 있고 친삼촌과 원수가 되어도 별 상관이 없게 된다. 인간 관계가 선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씨의 논문은 14~16세기까지의 조선 사회가 이런 방사형 혈연 사회였다는 점을 실증한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조선 사회가 가부장적 부계 사회로 변했고, 모계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을까. 이씨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퇴계 이 황을 필두로 16세기 후반 유림들에 의해 ‘성리학적 이념 운동’ 차원에서 주창되었다(위 상자 기사 참조). 문중(門中)이 처음 등장했고, 족보 편찬 붐이 퍼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어 임진왜란 등 난리를 겪고 사회가 피폐해지면서, 또 엘리트들의 의식 운동이 일반 백성에게까지 퍼지면서, 조선 사회는 점차 부계 중심 사회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