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박정희 기념관이냐, 기록관이냐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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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관 추가 지원 앞두고 논란 분분
죽은 박정희를 둘러싸고 산 사람들의 싸움이 치열하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설계안 공모가 한창인데, 그의 흉상이 철거되는 일이 벌어짐으로써 기념관 반대 운동이 눈길을 끌고 있다. 철거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용삼 운영위원은, 폭력 및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이들이 흉상 철거라는 강수를 둔 것은, 최근 들어 기념관 건립 사업에 가속이 붙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이 대구에서 ‘관용과 화해’를 역설하면서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지원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 7월 서울시가 상암동 부지를 기념사업회에 제공하기로 함에 따라 사업에 힘이 붙었다. 고 건 시장은 국회에서 ‘기념관이 아닌 공공 도서관으로 지어질 경우에만 부지를 제공한다’고 답변했지만, 진행 여부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지난해 국고에서 1백5억원을 지원했으며, 올해도 추가로 100억원을 지원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 또한 감지되고 있다. 비등한 비판 여론을 감안해서인지, 국회의원들이 추가 지원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나선 것이다. 온라인 매체 <오마이뉴스>가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소속 위원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 36명 가운데 21명이 박정희대통령기념관 건립에 대해 반대 혹은 보류했으며, 국고에서 추가로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다수인 32명이 반대 혹은 보류 의사를 표했다.

위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적인 쟁점은 국고 지원의 적합성 여부이다. 지난 5월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를 펴낸 전재호씨(경남대 지역문제연구소 연구위원)는 김대통령의 태도를 비판했다. “피해자인 김대통령이 가해자를 수용하는 것은 개인의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느라 역사적인 평가가 끝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관을 짓는 데 나랏돈을 지원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월권이다.”

지난 11월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대통령 기념관 혹은 대통령 기록관 논쟁’. 민주당 정범구·김성호 의원과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을 비롯해, 주진오·조희연·박승찬 교수가 참석했다. 참석한 이들은 모두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유가 다양했고, 대안에도 편차가 적지 않았다.

가장 공감을 얻은 대안은 박정희 기념관 혹은 박정희 기록관이 아닌 ‘역대 대통령 기록관’이다. 정범구 의원은 생존한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대통령의 기록을 집대성하는 대통령 자료관이 적절하다고 제안했다. 자료 수집과 운영 방침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해 이를 정치 교육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호 의원의 주장은 색달랐다. 그는 박정희 개인의 기념관 혹은 자료관은 물론 역대 대통령 기념관에 대해서조차 회의론을 폈다. 이름이 기념관이든 기록관이든 결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뜻을 담게 되리라는 것이다. ‘케네디 도서관에서 케네디에게 불리한 정보를 한 점 발견하지 못했다’는 그는, 대통령 자료관에 비치될 각종 기록의 자료 가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그는 “지금 필요한 것은 박정희기념관 국고 지원을 막는 것이다. 대안은 후대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토론자들이 역점을 둔 대목은, 한국 사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흐름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 박정희가 부활한 것은 여러 모로 이른바 진보 진영 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박찬승 교수(목포대·역사학)는, “대학생의 50%가 박정희기념관에 대해서 별 문제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경남대 지역문제연구소 전재호 연구위원은 ‘국민은 왜 보수 세력의 담론에 포섭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이유로 박정희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꼽았다. ‘어쨌든 우리를 부자로 만들었다’는 논리는, 박정권의 개발 논리에 내포되어 있던 배금주의와 물신주의가 한국인의 사고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정범구 의원은, 국민의 상당수가 ‘비이성적이지만 강력한 힘’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다원성을 혼란으로 여기는 파시즘적인 사고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사회학)는 최근의 사태를 ‘특정한 시민단체가 자신들의 뜻을 의사(擬似) 국가 의사로 만들어 관철하는 꼴’이라고 보았다. 과거 재벌이 자신들의 이해를 국가의 이해로 포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왜곡된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그는 제도권을 겨냥한 싸움을 제안했다. 전직 대통령이 사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료를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자료 환수 투쟁이나, 납세자를 중심으로 ‘공감대가 확보되지 않은 사업에 대해 국가가 지원하는 것은 납세자의 권리에 반한다’는 요지의 소송을 벌이자는 것이다.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곧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그 덕에 먹고 살 만하게 되었다는 주장과, 그 탓에 이 모양이 되었다는 주장이 맞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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