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도 두손 든 수능 시험 문학 문제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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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해석에 ‘정답’ 있나요? 수능 ‘미궁의 문’ 문제, 문인들 풀이 제각각…원작자가 답 못맞힌 경우도
오른쪽 페이지에 수능 언어영역 17번 문제가 있다. 기사를 읽기 전에 워밍업 삼아 한번 풀어보자. 답을 맞히느냐, 못 맞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된다.

S#1. 동국대 앞,11월26일 오후.

‘한국 현대시인 연구’라는 대학원 국문과 수업을 마친 교수와 제자들이 학교 건물을 빠져나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교수의 이름은 김명인(57). 시집 <바다의 아코디언> <머나먼 곳 스와니> <동두천> <길의 침묵> 을 냈고, 동서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받은 중견 시인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우연찮게도 이번 파동으로 유명해져버린 백 석의 시에 관한 것이다. 학생들 또한 대부분이 시인이나 소설가이다. <물 속의 아틀라스> <물보다 낮은 집> <적멸의 즐거움> 등을 펴낸 김명리 시인을 비롯하여, 시인과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이홍섭씨, 시인 류춘희·김지혜 씨, 소설가 손홍규씨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다.

학교 근처의 찌개집 2층. 이들이 자리한 테이블 위로 문제의 수능 시험지를 돌렸다. 다음은 이 날 ‘자유 방담’을 정리한 것이다.

“이건 백 석의 시를 해석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문제네.”

“실은 되돌아 나오기 위해 매달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여기서 요구하는 답은 아니예요. 정답은 미궁의 문이 맞죠.”

“문제는 지문이 논리적인 글이 아니고 시라는 거야. 시는 정서가 두드러지는 글이잖아.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아버지 친구였다는, 인연이란 맥락이 깔려 있거든. 그럼 실이 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테세우스는 이미 미궁의 문제를 알고 있고, 빠져나오는 방법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의원이나 마찬가지죠. 이렇게 놓고 보면 또 달라져요. 이때 미궁은 병적인 상황, 실은 청진기, 미궁의 문은 환부 같은 거죠. 그럼 답은 1번이네. 문제가 엉터리야.”

“시는 보는 사람마다 초점을 어디다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다 달라지지. 그게 문학 교육이고. 시에 정답은 없지.”

“요즘 어떻게 시를 배우는지 알 만하죠. 시를 이렇게 오답을 유도하기 위한 지문으로 읽다보면 시 자체가 싫어질 것 같아.”

S#2. 실천문학사 주간실, 11월28일 오후.

문학 평론가 황광수씨(59)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와 처음으로 만났다고 말한다. 친구가 <진달래>라는 시를 써내 전국 글짓기대회에서 2등 했는데, 그 시가 한동안 교실 뒷벽에 붙어 있었다. 진달래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으면서도 붉은 진달래를 연상시키는 시였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시를 보았을 때의 느낌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는 황씨는 “시는 전체적인 느낌으로 감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문학과 철학에 모두 밝다. 그에게도 이번 수능 문제를 보여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서 기호논리학 시간에 맨 처음 강조하는 것이, 한 문단은 한 의미만 가지고 있다는 것과, 문학적 언어를 배제하라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체계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단답형 정답을 유도하다니! 설사 답을 맞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인 신경림씨(67)는 후배들이 내민 시험 문제 하나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문제지에는 낯익은 자신의 시가 인쇄되어 있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두 점을 치는 소리/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신씨가 1988년 발표한 <가난한 사랑노래>라는 시다. 가난의 슬픔이 가슴 아리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용악 시인의 그리움>(1947년)과 박재삼 시인의 <추억에서> (1962년)도 함께 인쇄되어 있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연달린 산과 산 사이/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이용악)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이던가./울엄매야 울엄매,/별밭은 또 그리 멀리/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박재삼)

이제 문제를 풀 차례다. ‘세 시의 공통점으로 알맞은 것은 무엇인가?’ 무식하다고? 2년 전 수능시험에 출제되었던 문제다. 물론 객관식으로. 다음은 당시 제시된 보기들이다.

1)자연 친화적인 삶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2)화자 자신의 과거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고 있다. 3)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4)화자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5)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드러나 있다.

몇 번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시 정답은 5번이었다. 그러나 신경림 시인은 답을 맞히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라는 것을 답을 보고서 ‘깨달아야 했다’.

수능 파문이 점입가경이다. 복수 정답을 인정하자마자, 이번에는 애초에 정답을 맞힌 사람들이 시위하며 ‘재채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교육부 수장인 윤덕홍 부총리는 머리 숙여 사과했다.

이전에도 중학교 입시에서 복수 정답 파동이 일어난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대입 시험에서 파동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수능 점수 1~2점이 수험생의 평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현재의 학벌 사회가 파동을 키우고 있다. 이를 계기로 입시 제도 자체를 재검토하는 등 근본적인 해결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철학자 김상봉씨(45·문예아카데미 교장)는 “도대체 수학도 아닌 문학에 관련된 문제를 내주고 거기서 정답을 찾으라는 이런 미개하고 무식한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며, 우리 사회의 학문적 경쟁력을 위해서도 수능 시험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현직 국어교사인 박종호씨(41·한성과학고)는 익숙한 문제 유형이어서 지문이 달랐다면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라면서, “차라리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수능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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