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악의 명인 고 김대환의 음악과 열정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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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소진하다
지난 1월 중순, 김대환씨의 지인들은 엽서 한 장씩을 받았다. 한성대에서 열리는 김씨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엽서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빛 바랜 아이 사진 위에 김대환씨의 사인과 함께 ‘이 아이가 김대환(1933~1999)’이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이미 20세기에 자신을 장사지냈다는 것을 엽서 퍼포먼스로 보여준 셈이었다. 그 얼마 후인 2004년 3월1일, 타악 연주가이며 세서미각(細書微刻) 장인이고 철학자이자 폭주족이던 삶은 여분의 숨을 멈추었다.
사실 김대환씨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에 대해 안다고 해도 서양 드럼채와 장구채 등 6개의 스틱을 한꺼번에 쥐고 드럼을 연주한다든지, 쌀알 한 톨에 <반야심경> 2백58자를 새겨 <기네스 북>에 올랐다든지 하는 ‘기록’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좀 안다는 사람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꽁지머리를 기르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는 기인, 혹은 고교 중퇴 학력에 대학 교수가 된 사람쯤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내면을 가진 근대인이었다. 그의 삶은, 도올 김용옥이 언급한 것처럼 ‘20세기를 산 모든 예인들의 발자취가 그러하듯 비천과 허영이 엇갈린 역사의 뒤안길의 영욕을 한 몸에 맛본 인생’이었다.

조실부모한 그는, 후에 자신의 음악 동지이자 외사촌 형제인 강태환씨 집에서 컸다. 강씨의 외삼촌이 진보당수였던 죽산 조봉암이다. 덕분에 그도 죽산을 외삼촌이라고 불렀고, 젊은 시절 그를 따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딴따라’ 기질이 더 승했던지, 중학 시절부터 시작했던 그의 밴드 활동은 공군 군악대를 거쳐 미8군 무대로까지 이어졌다.

신중현·조용필 등과 어울려 밴드 활동을 했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그는 가요계의 재주 좋은 드럼 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가 ‘아티스트’로 거듭난 것은 1978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프리 재즈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때 함께한 이들이 강태환(알토 색소폰)과 최선배(트럼펫)다.

“박정희 말기였다. 공연이 열리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와 지켜봤다. 대부분 즉흥 연주였는데, 그들이 계속 제목이 뭐냐고 묻기에 ‘프리 뮤직’을 줄여 fm1, fm2 식으로 지어 붙였다. 당시 프리 재즈 팀은 우리뿐이어서, 음악 하는 사람들조차 무슨 음악이 그러냐고 반문하던 시절이었다.” 트럼펫 주자 최선배씨(61)의 기억이다. 이렇게 악보 없이 테마만 정한 채 즉흥 연주를 해가면서 그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는 강준혁씨(57·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가 기획한 ‘울타리굿’ 동인으로 활동했다. 울타리굿은 피아노 곡에 맞추어 검무를 추고, 살풀이와 재즈가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전통과 현대를 섞어놓은 일종의 실험 공연이다. 김대환(드럼) 강태환(색소폰) 안숙선(판소리) 육태안(수벽치기) 남정호·이혜경(무용)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이 공연의 단골 멤버들이었다. 김씨는 이를 계기로 세계 무대에 진출했다. 그리고 지금껏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일본 간사이 페스티벌 등에서 5백여 회의 순회 연주를 벌였다. 그의 이름은 국내보다 일본이나 유럽에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취재 중 만난 김씨의 지인 중 몇몇은 그를 기억하며 울었다. 엉엉 운 사람도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천진하게 노닐고 갔다는 증거로 그만한 것도 없을 듯하다. 울던 이들은, 그러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방긋 웃었다. 놀랍도록 심했던 그의 건망증을 언급할 때였다.

울타리굿 연출자인 강준혁씨가 공연 중 분장실에서 직접 목격한 일이다. 먼저 연주를 마치고 쉬고 있던 피아니스트 강준일씨가 땀을 훔치며 들어서는 김씨에게 “대환형 수고 많았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어, 그래 그동안 잘 있었어?”라고 받더라는 것이다. 방금 전 같이 공연한 사람인데도 연주에 몰두하느라 그만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밖에도 건망증과 관련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길을 건너려고 육교에 올라갔다가 다시 같은 방향으로 내려간 일, 차를 어디 두었는지 잊어버려서 사흘 만에 경찰이 나서서 찾아준 일, 해외 공연을 마치고 악기를 그냥 둔 채 귀국한 일, 심지어 길에서 부인을 만났는데 그냥 아는 사람이다 싶어 눈인사만 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놀라운 건망증은, 하지만 더 놀라운 집중력의 소산이었던 듯하다. 그는 어딘가에 한 번 빠지면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었다. 쌀알이나 천 조각에 글자를 새기는 세서미각이나 불교 경전을 거꾸로 쓰는 좌서 등은 이런 성벽으로 일구어낸 성과였다. 밤업소에 서기 싫어 취미로 시작한 일을 그는 생계의 방편으로 바꿔냈다. ‘딴따라’만 해서는 굶어죽기 십상이고 ‘예술’ 소리는 들어야 밥벌이가 되는 한국적 실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다 그는 0.2mm 텅스텐 핀으로 쌀알을 긁을 때 나는 소리에 심취했다. 그는 지난해에 연 세서미각 전시회의 이름을 ‘음각전(音覺展)’이라고 붙였다. 소리를 찾기 위한 그의 집념은 유별나서, 소나기가 퍼부으면 오토바이 타고 도로를 질주하기도 했다. 헬멧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땅에 울리는 엔진음을 듣기 위해서다.

흔히 그의 음악 세계를 요약해 ‘원 비트의 음악’ 혹은 ‘불협화음 속의 조화’라고 설명한다. 그의 관심은 얼마 전부터 음악을 넘어선 소리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널리 알려진 호는 흑우(黑雨). 검은 색에는 모든 색이 융합되어 있다. 빗줄기는 때림, 비트를 뜻한다.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는 묵우(默雨)라고 호를 바꾸었다. 음악 평론가 김진묵씨(52)는 “모든 소리를 넘어서고 난 뒤의 경지가 침묵이다. 그의 호에는 그가 추구했던 음악 철학이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그를 천재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만큼 지독한 연습벌레도 없었다고 말한다. ‘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까지 드럼을 쳤다. ‘김대환 박물관’으로 바뀔 예정인 서울 인사동 그의 작업실에는 그가 발바닥 촉감을 느끼기 위해 신고 연주했던 해진 발레 슈즈와 닳아 망가진 드럼 페달, 핏자국이 선명한 스틱 등이 한 움큼 쌓여 있다.

김씨에게 작업실을 마련해준 후원자이자, 부부 사이보다 더 가깝다는 말을 들으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해온 유재만씨(59)는 “(드럼 소리 때문에) 귀 망가졌지, (세서미각하느라) 눈 버렸지, (드럼 연습에) 팔 못쓰게 되었지…, 태어나서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완벽하게 소진하고 돌아갔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강준혁씨는 “장인들은 남을 위해 계단을 놓아주지는 않지만,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흑우는 후배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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