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회 열기 띄운 '열혈 연예인'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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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반대 촛불 시위 참여한 연예인들 “우린 한 일 없다. 그냥 장단이나 맞출 뿐”
월드컵이 ‘축구’를 가르치고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이 ‘반미’를 가르쳤듯, 탄핵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지난 3월20일,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열린 ‘탄핵무효 부패정치청산 민주개혁 완성을 위한 1백만인 대회’는 그대로 민주주의의 현장 학습장이었다. 탄핵 이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기 위해 시민 20만여명이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다.

저녁 6시에 시작한 집회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6시간 동안 이어진 촛불 집회에는 사회를 본 권해효씨를 비롯해 개그맨 노정렬씨, 배우 오지혜·홍석천 씨, 가수 정태춘·박은옥·신해철·안치환·권진원 씨, 록그룹 블랙홀, 신세대 가수 서문탁·조PD·BMK 등 연예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번 탄핵 정국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촛불집회에 대한 감회를 무대 뒤에서 들어보았다.

행사 사회를 본 배우 권해효씨는 대표적인 노사모 연예인으로 통한다. 그러나 그는 이번 탄핵 정국을 ‘친노 대 반노’로 보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지난 3월12일 우리는 국제 사회에서 ‘개망신’을 당했다. 이제 국민의 힘으로 다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워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이고 ‘상식 대 몰상식’의 전쟁이다”라고 말했다.

“상식 대 몰상식, 국민 대 의회독재의 싸움”

시사 풍자를 주로 하는 개그맨 노정렬씨 역시 이번 탄핵 정국을 ‘친노 대 반노’의 대결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양비론이라며 “이것은 ‘국민 대 의회독재’의 대결이다. 민심이 하지 말라는데도 더 썩고 더 잘못이 많은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한 것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다”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른 노씨는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 성대 모사를 통해 탄핵을 비난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 결정에 반대해 1인 시위까지 벌였던 오지혜씨 역시 탄핵안 가결 소식에 분노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단 한 명도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라며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비난했다.

오씨는 촛불집회를 무겁고 비장하게 할 필요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수구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소리지를 것 없이 오늘은 그냥 즐기고 4월15일 조용히 심판하면 된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른 오씨는 <사랑밖에 난 몰라>를 개사한 <민주밖에 난 몰라>를 불러 집회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198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민중 가요 가수집단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인 안치환씨와 권진원씨도 촛불집회를 찾았다. 촛불집회에 모인 시민들을 보고 이한열 열사의 추모 행렬을 떠올렸다는 권진원씨는 “그때의 군중은 분노와 비장함으로 뭉쳐 침울했다. 하지만 오늘 모인 시민들은 밝다. 마치 축제와 같은 모습이다. 그 밝음 속에 진지함과 건강함이 있어 보기 좋다”라고 말했다. 노래를 시작하기 전 권씨는 군중을 향해 “이 땅의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살아 숨쉬도록 노래하겠다”라고 말했다.

촛불 집회에는 서문탁·조PD·BMK 등 신세대 가수들도 대거 참가했다. 일본 유학 중에 급히 귀국해 광화문으로 달려왔다는 서문탁씨는 “팬들로부터 국내 상황을 들었다. 팬들이 ‘지금 국민들 심정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상황을 파악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알될 것 같아 귀국했다”라고 말했다. 서씨는 진정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4월15일 다시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다.
록그룹 블랙홀의 등장은 의외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롱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나온 블랙홀의 멤버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공연을 하지 못하더라도 멤버들과 촛불 들고 오려고 했다는 블랙홀 리드 싱어 주상균씨는 “역사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광복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주류 수구 세력이 결국은 바뀌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메탈 사운드로 수구 언론사 건물 균열 낼 것”

무대 시설이나 음향 시설이 형편없이 떨어졌지만 록밴드에게 최고의 무대라며 그는 “여기 와서 멤버들과 웃었다. 두 수구 세력(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가리킴) 건물 사이에서 이런 공연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한 메탈 사운드로 건물에 균열을 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탤런트 홍석천씨도 집회장을 찾아 동료 연예인을 격려했다. 틈이 날 때마다 촛불 집회를 찾는 그는 “오늘까지 세 번째 나왔다. 누가 불러서가 아니라 그냥 나온다. 화가 나서 도저히 집에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 집회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홍씨는 더 많은 연예인들이 촛불 집회에 참가하고 싶지만 방송 활동에 부담이 될까 봐 오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나야 어차피 방송국에서 미운털 다 박혀 잃을 것을 다 잃었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홀가분하게 올 수 있지만 다른 연예인들은 그렇지 않다. 더 많은 연예인이 오지 못해 아쉽다”라고 말했다.

가요계에서 대표적인 논객 가수로 통하는 신해철씨도 어김없이 집회에 나타났다.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그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우리 자식들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여론조사를 조작이라고 말하고 여기 모인 사람들을 동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이 들리도록 소리치자. 우리는 지금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옮기고 있다. 수레바퀴를 바로 돌려 우리의 손자들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이 되자”라며 집회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부르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가수 정태춘씨는 촛불집회의 성공이 모두 성숙한 시민의식 덕분이라며 공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그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 그냥 장단이나 맞춰줄 뿐이다. 전부 시민이 이룬 일이다. 잠시 함께 하자는 생각으로 나왔다. 정말 위대한 시민들이다. 탄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탄핵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고 정확히 행동했다. 이것이 혁명이 아니면 무엇이 혁명이겠나”라고 말했다.

촛불집회는 광화문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렸다. 광주에서 촛불집회를 이끈 가수 김원중씨는 “탄핵안이 가결되는 것을 보고 울었다. 그것이 이 땅의 수준인가 싶어서 슬펐다. 쇼 프로그램에 나가서 얘기할 내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수가 시사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한 시민으로서 답답한 마음에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 거리로 나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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