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현실]노출이 강간 유혹?...허튼소리 말라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6.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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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 노출→성충동→성범죄’ 물증 없어…경찰의 단속은 여성에게 올가미 씌우기
 
지난 여름은 여성의 노출이 그 어느 때보다 심했다. 8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60~70년대풍 복고 바람에다, ‘육체도 패션의 한 요소’라는 새로운 인식이 덧붙었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들의 거리 패션은 육체 그 자체와 육체의 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보였다. 광적인 다이어트 열풍도 여기에 합세해 날씬한 몸매를 과시하는 노출을 한껏 부채질했다.

그런데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오는 마당에 노출의 계절이 ‘연장’되고 있다. 국가 공권력도 복고풍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지난 8월25일 경찰청은 70년대에 ‘유행’했던 복장 단속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41항 ‘과다 노출’ 규정을 적용해 불특정 다수 또는 다수인의 눈에 띄는 장소에서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은 행위’등을 단속하라는 지침을 일선 파출소에 보냈다.

경찰청은 △여성의 신체 노출이 점점 과다해지는 추세인데, 유림 및 시민단체에서 강력히 단속해 달라는 건의가 있고 △과다 노출이 풍기 문란 및 성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는 실정이며 △배꼽 및 상반신 과다 노출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어 소극적 단속을 해왔다는 사실이 이번 단속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의 뒤늦은 단속을 지켜보며 풍기 문란을 염려해오던 쪽에서는 잘한 일이라며 응원을 보내고 있지만, 또 한쪽에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은 92년부터 스웨덴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성폭력 세계 2위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당국의 고육책인지 모르지만, 경찰청의 단속 지침은 예방보다는 성범죄와 관련한 통념, 즉 ‘여성의 몸가짐에도 잘못이 있다’는 고정 관념을 더욱 고착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문제는 과다 노출이 성 ‘충동’이 아닌 성 ‘범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한국여성의전화·한국성폭력상담소 등 관련 단체에 따르면, 노출 패션이 성범죄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없다. 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성폭행을 당한 여성 중 19세 미만이 50% 이상(13세 미만은 전체의 30%)으로 노출 패션과 거의 관련이 없는 학생층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성폭력이 계절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인식의 문제이다. 노출의 계절이라고 해서 성폭력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 발생 빈도는 계절과 관련이 없다. 게다가 성범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보면, 친인척·직장 상사·데이트 상대·교사·동네 사람 등 아는 사람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모르는 사람의 경우도 대부분 계획된 범죄를 저지른다. 노출 패션이 성 충동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성폭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경찰력 과다 노출이 노출 패션보다 심각”

성 충동, 곧 성욕이 성폭력을 낳는 것도 아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 부장은 “성폭력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지배하는 행위이지, 성욕과는 별 관계가 없다. 성폭력의 대상이 반항하지 못하는 어린 연령층으로 자꾸 내려가는 추세는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성폭행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대해 분노나 소외감을 갖는 이들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력을 행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철저한 권력의 문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청이 단속의 근거로 내세운 ‘과다 노출→성충동→성범죄’화살표 공식은, 단순한 심증만 있을 뿐 확실한 물증이 없다. 경찰청의 단속은, 노출 패션을 성범죄의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1차적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릴 개연성을 안고 있다. 또 과다 노출을 성범죄와 연관시킴으로써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마저 모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찰이 여전히 ‘여성 유발론’이라는 통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속이다. 여성에게 1차적 책임을 묻는 것은 가해자인 남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자, 피해자인 여성에게는 또 하나의 올가미를 씌우는 일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영애 소장의 말이다.
패션, 그 가운데서도 거리 패션은 한 시대의 정치·사회·문화 환경과 그로 인한 심리를 민감하게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신승철씨(광혜병원 원장)의 분석을 들어 보자. “정신분석학으로 보면, 노출 패션은 단순해지는 인간 관계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관계에서 자꾸 소외되다 보면 몸을 통한 자기 표현 욕구가 극대화한다.”

경찰청의 단속 발표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정유성 교수(서강대·교육학)는, 문제는 결국 여성의 노출이 아니라 성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남성들의 음험한 눈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찰청이 정한 단속 기준은 대부분 모호하다.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은 행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위’‘불쾌감을 주는 행위’등 단속 경찰관의 주관적·개인적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는 기준들이다.

“70년대의 장발 단속이 지금은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이번 경우도 나중에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단속이 될 것이다. 데모대에 총기 사용을 불사하겠다, 고무 총탄을 쓰겠다는 발표와 더불어 민주화 이후의 개방 분위기에 역행하는 조처로 보인다”라고 전상인 교수(한림대·사회학)는 말했다. 전교수는 시민 사회에서 숨어 있어야 할 경찰의 ‘과다 노출’이 ‘패션 노출’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다 노출이 비록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더라도, 그것은 개인이 결정하는 자기 표현의 한 방법이므로 그 나름으로 존중해 줘야 한다. 성폭력을 방지하는 길은, 이런 유치한 수준의 단속이 아니라 성 태도 교육을 비롯해 사회 전체가 성문화에 대해 공개적이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가능하다” 라고 정유성 교수는 말했다.

경찰청의 노출 단속은 촌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일간지의 독자투고 난과 컴퓨터 통신을 통해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주의를 환기하자는 뜻에서 발표했다’고 경찰청 관계자가 밝히고 있거니와, 무엇보다 노출의 계절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패션 주기가 급격하게 짧아지고 있는 만큼 내년 여름이면 또 다른 유행이 거리 패션을 휩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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