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참을 수 없는 한국 문학의 무거움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6.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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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씨 <날아라 거북이!>·성석제씨 <새가 되었네>/‘가벼움의 문학’ 가능성 선보여
 
문제는 가벼움이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선 한국 소설은 가벼워지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다. 80년대의 무거움을 털어버리기 위해 갖가지 다이어트 비법을 동원했다. 밀란 쿤데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수입’했고, 80년대 후반 이후 소설의 한 장르처럼 보였던 ‘소설 ○○○○’류의 강점(서사성)을 적극 차용하자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러나 한국 소설은 다이어트에 성공하지 못했다. 80년대의 그림자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외면하면서도, 90년대의 현란함(그러나 거품인)에 촘촘한 그물을 던져 ‘이것이다’라고 환호하는 작품도 거의 없었다. 한쪽에서는 존재의 심연을 파고들었고, 또 다른 쪽에서는 개인(가족)사를 탐사했다. 특히 후자는 30대 여성 작가들에 의해 주류를 형성했는데, 이같은 경향을 평론가들은 ‘社人化’라고 명명했다.

90년대 한국 소설의 지형도가 위와 같은 존재론과 사인화 두 경향만으로 그려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80년대를 돌아보는 ‘후일담 소설’, 한국 소설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로드 로망(여행 소설)’, 후기 산업사회를 후기 산업사회의 언어로 포착하려는 ‘신세대 소설’등 90년대 한국 소설의 내면 풍경은 단순하지가 않다.

 
한국 소설의 비상구인 가벼움에 대한 갈증은 소설의 위기와 연결된다. 영상 매체가 견인하는 대중 문화 시대에 ‘소설책’은 과연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소설의 생존권과 연관된 문제다. 이 과정에서 대중성 논쟁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소설은 결국 이야기(서사)이며, 그것도 독자들이 요구하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주장을 놓고 양쪽에서 서로 돌을 던졌다. 독자가 먼저냐, 소설이 먼저냐. 독자를 우선할 때 소설은 자칫 상품 미학의 논리에 포섭될 위험이 있고, 소설을 먼저 내세울 때 소설은 독자로부터 격리될 우려가 있었다.

그 와중에 ‘무궁화꽃’은 수백만 송이가 피었고 ‘제국은 영원’했으며, 좀머씨는 ‘나를 제발 그냥 내버려 둬’라고 외쳤다. 일부 90년대 작가들은, 소설이 하나의 상품이며, 소설가는 전문직 노동자라는 자화상을 그렸다.

90년대 천민자본주의의 전형 형상화

최근에 나온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박덕규씨(38)의 첫 소설집 <날아라 거북이!>(민음사)와, 역시 시인 출신인 소설가 성석제씨(36)의 두번째 소설집 <새가 되었네>(강 출판사)는 위와 같은 90년대 중반 한국 소설의 복잡한 지형도 한복판에 놓인다. 이 두 소설집이 ‘가벼움의 문학’의 한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박덕규씨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향해 ‘날아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날지 못한다. 거개가 지상에 고꾸라진다. 작가가 날라고 지목하는 인물들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절정을 보이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들. 지식 산업의 총아인 출판 문화의 뒷골목에서 ‘한 건’(베스트 셀러)을 기획·편집·제작하고 유통시키는 反문화적 게릴라들이다. 출판 문화를 교란하는 이들에게 날아가는 ‘날아라’라는 명령어는 곧 풍자다.
<날아라 지섭!> <날아라 동혁!> <날아라 처남 매부!> 등 모두 여덟 편으로 완결되는 이 연작 소설은 출판 문화의 어두운 뒷골목이 주요한 소설적 공간이지만, 그리하여 지섭이나 동혁과 같은 인물들은 공적 영역(낮/일)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反문화적 출판인이지만, 사적 영역(밤/가정)에서는 아내에게 여지없이 당하는 무기력한 가장이다.

 
다이어트에 몰입하다 건강을 해치고 만 처제와, 연예인이 되기 위해 물불을 안(못)가리는 처남, 소설 속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들어 자기 최면을 거는 동혁, 특종을 ‘기획’하는 방송사 기자들, 빨간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이 꿈인 맹인 안마사, 80년대에 입은 상처로 고통을 겪고 있는 문인을 남편으로 둔 출판 기획자 등에 이르면 <날아라 거북이!>는 90년대 풍속의 극사실화로 확대된다.

성석제씨의 두번째 소설집 <새가 되었네>에는 중편 <스승들>과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비롯한 단편 여섯 편 등 모두 일곱 편이 실렸다. 작가가 공식으로는 처음 발표한 단편소설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지금까지 발표된 성석제 소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압축 파일’이다.

마라도나의 드리블처럼 속도감 있는 단문

그의 소설의 가장 큰 무기는 새로움과 자유 분방함이다. 이제까지 한국 소설 문학에 부재했던 상상력과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상상력과 문장은 매우 가볍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하는 한 건달의 ‘마지막 4.5초’를 한없이 연장시킨다. 작가의 능청스러운 시간 끌기 작전은 우선 그 내용과 어울리는 형식에서 나온다. 각주 달기. 물론 각주 달기는 70년대 후반 일본 현대 소설이 번역되면서 선보였지만 성석제씨의 단편에서처럼 효과를 거둔 예는 거의 없었다.
 
현대인의 삶이 갈수록 강퍅해지는 원인을, 갈수록 작은 단위로 측정되는 시간에서 찾은 사회학자가 있었거니와, 성석제씨는 <내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시간을 75분의 1초(찰나, 일념)까지 세분한다. 4.5초가 그만큼 확대되는 것이다. 직선적인 시간관(소설의 서사 구조)은 각주에 의해 줄곧 방해를 받는다.

하지만 소설은 ‘과속’한다. 추락하는 자동차 안에 타고 있는 폭력 조직의 한 건달과 그 애인이 처한 절체 절명의 상황을 따라가는 문장에는 축구 선수 마라도나의 드리블처럼 현란한 속도감이 붙는다. 간혹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배치해 이야기의 방향을 틀 때를 제외하면, 그의 문장은 접속사가 거의 없는 단문이다. 예컨대 ‘지금 새로운 인물이 왔다. 나를 도와준다. 사업을 하고 있다. 실력이 있다. 의리도 있다. 뒤를 봐주는 사람이 많다’와 같은 문장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몰고 나간다.

성석제 소설의 속도를 줄여주는 브레이크(쉼표)는 웃음이다. 소설의 묘사나 설명은 차가운 단문이지만, 그 단문들은 도처에서 웃음을 터뜨린다(다른 사람을 웃기는 사람은 스스로 절대 웃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들은 한국 문학의 무거움, 즉 엄숙주의를 난타하면서 달려나간다. 가벼움의 향연이다.

성석제씨의 이번 소설집은 한 중소 기업 사장의 자살을 다룬 표제작 <새가 되었네>를 제외하면 거개가 폭력을 둘러싼 성장 소설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각 중·단편들은 저마다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와 이성애가 아련하게 교차하고 있는 <첫사랑>은 2인칭 소설이고, 소년기에 품었던 사랑의 감정을 반추하고 있는 <황금의 나날>은 종결 어미를 ‘~이다’가 아니라 모두 ‘~네’로 처리하면서 다성성(多聲性)을 성취하고 있다.

박덕규씨는 ‘쿤데라에게 빠른 문체의 속도감이 없었다면, 그가 말하는 ‘느림’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한국 문학은 느림을 주장할 자격이 있을까’라고 작가 후기에서 반문하고 있다. 여기에서 빠름은 가벼움으로, 느림은 무거움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박덕규씨와 성석제씨의 소설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날아라, 한국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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