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대학 강당, 匠人들에게 문 활짝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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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프로 기사 등 전문가, 대학 강단에 줄이어 진출…풍부한 경험 후학들에 전수
강단에 선 이두호 교수는 날카롭게 깎은 연필을 들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내 책상에는 이런 연필이 40여 개 있습니다. 샤프를 쓰면 깎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만, 뾰족했던 것이 점점 뭉툭해지는 연필의 묘미는 느낄 수 없지요. 게으른 사람은 샤프를 쓰세요.”

이현세씨와 더불어 이번 학기부터 세종대 영상만화과에서 강의하는 만화가 이두호씨는, 1학년 과목인 ‘만화 묘법’ 강의를 철저하게 실기 위주로 하고 있다. 연필과 종이와 지우개를 고르는 방법, 심지어는 30㎝ 자에 동전을 어떻게 붙여 사용해야 하는가 등 이교수의 강의는 가장 기초적인 도구 사용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30년 동안 쌓아온 작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하나하나 풀려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 만화계의 스타인 이두호·이현세 씨 같은 전문인들이 최근 대학 강단을 누비고 있다. 석·박사 학위자가 아니면 교수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대학들이, 올해 들어서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있다. 풍부한 경험을 지닌 ‘학위 없는 전문가들’에게 대학은 생생한 현장 경험을 강의해 주기를 원한다.

올해 대학 강단에 선 전문가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박권상(언론인) 노신영(전 총리) 박춘호(국제해양재판소 재판관) 김경원(전 외무부장관·이상 고려대), 박경리(소설가·연세대), 조정래(소설가) 신경림(시인·이상 동국대) 씨 등 유명 석좌 교수들 외에도, 수많은 전문가들이 겸임 교수·시간 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십 년 쌓은 업적으로 박사 자격 대신

세종대에서는 94년 2학기부터 소설가 이문열씨가 국문과 전임 교수로서 강의해 오고 있으며, 올해 신설된 이화여대 통역대학원에서도 소설가 겸 번역가인 안정효씨가 ‘기초 번역’이라는 과목을 맡고 있다. 명지대는 올해 체육학부에 바둑지도학과를 신설하고 프로 기사 정수현 8단을 겸임 교수로, 원로 기사 조남철 9단을 객원 교수로 임명했다. 이밖에도 경영학·광고홍보학 등 산업 현장과 비교적 가까이 있는 학문 분야에서 전문가를 영입하는 ‘산학 협동’ 차원의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업을 가지고 강단에 서는 이들에게는 주로 겸임 교수라는 직함이 주어진다. 엄격하게 말하면 강사이지만, 대학이 이들의 경력을 예우해 교수로 초빙하는 제도이다. 이들은 당연히 전임 교수들이 맡을 수 없는 실기 위주의 강의를 담당한다. 또 대학에 생소한 학과가 생겨나 석·박사 학위자를 전임 교수로 채용할 수 없을 때 전문가들에게 겸임 교수라는 직함을 주고 강의를 맡긴다. 세종대 영상만화과와 명지대 바둑지도학과가 이 경우이다. 94년에는 한국과학재단이 운영하는 ‘전문 경력 인사 초빙 활용 지원’ 프로그램이 생겨 이민섭 전 문화체육부장관 등 전직 고위 공직자와 경영자 76명이 여러 지방 대학에서 1년 계약으로 강의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교수 대부분은 박사 학위 소지자가 아니다.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이 박사 자격을 대신한다. 겸임 교수뿐 아니라 기부금을 받아 운영하는 석좌 교수 제도도, 최근 들어 바로 그 현장 경험을 강의실로 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데 가장 큰 뜻을 두고 있다. 고려대 전성연 교무처장은 이렇게 말한다. “개방 시대로 가고 있는 지금 학생들을 우물안 개구리처럼 교실에 가두어 놓고 가르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대학이 폐쇄적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앞으로는 그 개념이 바뀔 수밖에 없다. 각계의 탁월한 분들을 모시는 석좌 교수 제도는 점점 더 확대될 것이다.”

대학원에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강의하는 다른 석좌 교수들과 달리, 박권상 교수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학부 강의를 맡았다. 1주일에 3시간인 이 강의에서는 학생들에게 벌써 기말 리포트 과제가 주어졌다. 박교수가 추천하는 각 신문사 논설위원들을 만나 그 신문사의 기본 방침·성격·노선을 파악해 와야 한다. 강의 프로그램은 논설 등 신문 문장들을 직접 쓰고 발표·토론하는 실기 위주로 짜여 있다.
언론사(<한국일보> <시사저널>)에서 대학 전임 교수로 자리를 바로 옮긴 안병찬 교수(경원대·신문방송학)도 40년 가까이 쌓아온 풍부한 ‘실전 경험’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있다. “강의를 하다 보면 경험담이 자주 나온다. 이론을 이야기할 때 꾸벅꾸벅 졸던 학생도 경험을 이야기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라고 안교수는 말했다. 특히 안교수는 현직 후배 기자를 취재하거나 초청해 강의실에서 생생한 현장 소리를 들려주는 방법을 꾸준히 활용해 오고 있다.

신경림 시인과 더불어 올해 동국대 석좌 교수로 임용된 소설가 조정래씨는, 60년대 동국대 재학 시절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서 들은 ‘살아 있는’ 시론 강의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재가 있었으나,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님의 침묵> 같은 시 감상에 들어가면, 미당의 눈빛과 몸짓은 마치 신들린 것 같았다. 시를 육화한 뒤 신들린 무당처럼 자기 감정을 들려주던 미당의 그 모습은 우리의 영혼을 자극했었다. 나의 강의도 이론이 아니라, 학생들의 잠재된 예술혼을 일깨우고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94년 소설가 이문열씨가 대학 강단에 설 때만 해도 학위 문제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해 7월 세종대에 임용된 이씨는, 12월에 가서야 교육부로부터 정식 교수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홍보 효과 노리는 대학측 의도도 작용

최근 대학들이 앞다투어 ‘학위 없는 전문가’들을 교수로 초빙하는 것은 법 개정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교육부가 교수자격인정심사준칙을 개정해 교수 자격 판단을 각 대학 자율에 맡긴 것이다. 이에 따라 석·박사 학위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학이 정한 기준에 따라 교수로 임용할 수 있게 되자 대학들이 갖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유명 인사를 교수로 초빙하면 큰 부가가치가 따른다. 우선 홍보 효과가 크다. 어느 전문가가 어느 대학에 임용되었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면, 그것이 신입생을 유치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다. 유명 인사 초빙은 대학으로서는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광고 전략이자 카피인 셈이다. 어느 겸임 교수는 얼굴 마담 역할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기업체 간부를 겸임 교수로 채용할 경우 그들은 산업체와 대학을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한다. 대학 바깥에서 연구비를 끌어올 수도 있고, 졸업생의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 취업도 어느 정도 떠맡을 수 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겸임 교수 제도에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려는 대학들이 겸임 교수라는 제도를 통해 교수 인원 확보율을 높이려고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 사회는 전문가들의 강단 진입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해 현업과 학계가 벽을 쌓은 채 서로를 모르고 불신하던 구조를 깨고, 또 사회에 진출하는 졸업생들로 하여금 현장에서 곧바로 일할 수 있게 하는 ‘산 교육’이 대학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학이 중세풍 상아탑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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