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문화]전국민의 음식, 냉면 맛의 비밀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8.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국민 별미로 자리매김…육수·면발·헹구기 삼 박자 맞아야 제맛…단백질·지방·비타민B 풍부
97년 12월 IMF 체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에서 산업이란 산업은 모조리 된서리를 맞았다. 그 가운데서도 소비 산업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음식 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는 법. 냉면이다. 냉면만은 번창일로에 있는 것이다.

냉면 붐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북한 귀순자들이다. 그들은 냉면 시장에서 맛 전쟁을 벌인다. 96년 2월 북한 문화예술부 가수 출신인 김 용씨가 일산 신도시에 세운 ‘모란각’을 시작으로 하여, 동독 유학생 출신인 전철우씨가 ‘전철우 고향랭면’ 문을 열었고, 만수대무용단 춤꾼이던 신영희씨 부부가 ‘진달래각’으로 그 뒤를 이었다.

북한 귀순자,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이라는 점말고도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냉면집 체인점화. 김 용씨는 전국에 44개 분점을 열어 음식점으로는 국내 최대 점포망을 갖춘 ‘준재벌’ 반열에 올라섰으며, 전철우씨도 1년2개월 만에 체인점 40개를 거느렸다. 신영희씨는 ‘북한 상류층이 즐기는 냉면’이라는 차별화 전략으로, 지난 1년 동안 대형 체인점 6개의 문을 열었다. 중국 출신 화교들이 중국 음식점을 전국화했듯이, 유명 귀순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냉면 붐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냉면 소비, 고기 소비와 비례

유명 귀순자들만이 아니다. 여만철·강봉학·김동춘·김선일·윤경석·강명도·장영철 씨들이 냉면집을 열었으며, 얼마 전에는 온 가족을 이끌고 내려온 김만철씨도 냉면 전쟁에 가세했다. 게다가 지난 5월에는 ‘평양 옥류관 서울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냉면집(북한에서는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도 문전성시이다. 햇볕 정책에다 금강산 뱃길이 열렸다고 하지만, 냉면만큼 북한 바람을 많이 타는 분야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냉면 붐이 꼭 북한 바람에서 연유한 것만은 아니다. 평안도·함경도 지방의 고유 음식인 냉면이 전국화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먼저 외식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그 내용이 변화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음식업중앙회에 따르면, 80년 외식업소 가운데 11.7% 점유율을 보인 한식 업소는 꾸준히 성장해 94년을 분기점으로 점유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외국 패밀리 레스토랑이 밀려들었지만, 한식이 급성장하는 데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98년 한국음식업중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한식 업소는 20만9천개인 데 비해, 양식은 3만개이다.

한식 가운데서도 ‘고기 구워 먹는 문화’의 확산은 냉면까지 널리 대중화했다. 갈비·불고기·삼겹살 같은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고 난 뒤, 밥을 안먹자니 서운하고 먹자니 부담스러운 그 심리적 틈새에 냉면이라는 가볍고 깔끔한 음식이 끼어들었다. 전통적으로 불고기가 유명한 평안도 지방에서도 불고기를 먹은 뒤 냉면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지난 2월 중앙대 의약식품대학원에서 ‘냉면’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서울 청담동의 한정식 ‘용수산’ 주방장 봉하원씨의 설명. “냉면 소비는 고기 소비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고기와 냉면은 원래 궁합이 잘 맞는다. 냉면 육수를 고기로 우려내는 데다, 고기 구워 먹는 문화가 대중화하니까 냉면도 덩달아 유행하게 되었다.”

다음은, ‘꼭 밥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점을 꼽을 수 있다. 절대 빈곤 시대도 아닌 지금 1차 음식인 밥이야 언제나 먹을 수 있으니, 이제는 산뜻하고 부담도 적은 데다 밥처럼 무겁지 않은 2차 음식인 국수나 냉면 쪽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겨난 것이다. ‘냉면 마니아’ 가운데 한 사람인 소설가 이인환씨는 “예전에는 국수나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요즘에는 싫어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다”라고 말했다(74쪽 딸린 기사 참조).
“냉면은 변비에 좋은 음식”

마지막으로 건강과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 평양식 냉면의 주원료는 서북 지방과 강원도에서 주로 생산되는 메밀이다. 메밀은 대부분 무공해 지역에서 재배될 뿐만 아니라 비료나 농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물이다. 게다가 양질의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고, 비타민B군이 쌀의 3배에 달하며 특수 아미노산도 다른 곡류에 비해 많이 들어 있다. 신민자 교수(경희대·조리과학)에 따르면, 메밀에 들어 있는 ‘루틴’이라는 성분은 모세 혈관을 확장시키는 효능을 발휘한다. “이 때문에 냉면은 고혈압에 좋고,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다.”

음식 칼럼니스트 김순경씨는 냉면의 효능을 더 꼽는다.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때, 육수만 마셔도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음식이라는 것이다. “여름에 입맛이 떨어져 밥을 소홀히 하게 되면 변비가 생기는데, 더울 때의 변비는 엄청나게 해롭다. 냉면은 변비에 틀림없이 효과가 있다. 근본적으로 몸을 차게 해주는 약리 작용이 있어서 더위를 속에서부터 식혀 주는 구실도 한다. 냉면은 속이 더부룩할 때 장을 깔끔하게 청소하기도 하는 참 좋은 음식이다.”

냉면에 푹 빠진 이들은, 냉면이 지닌 ‘마약’ 같은 매력을 많이 이야기한다. 전국의 유명 냉면집에서는 어릴 적 냉면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북한 출신 장년층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서울 목동에 사는 이경렬씨(70)도 ‘냉면쟁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46년 평양에서 월남한 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냉면집에 출근했다. 그는 어릴 적 평양에서 냉면을 시켜다 먹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추운 겨울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덜덜 떨면서 차가운 국물을 들이키던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닌다. 담백하다는 말 외에는 그 맛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메밀을 씹는 맛도 독특하다. 밤에는 냉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기도 했다.”

냉면은 실패 확률 높은 ‘비극적 음식’

서울 태생인 소설가 최인호씨는 평양 출신 아버지를 둔 ‘냉면 마니아 2세대’이다. 거의 매일 냉면을 먹는 그가 보기에, 냉면처럼 비극적인 음식도 없다. 그만큼 만들기가 까다롭고 실패할 확률이 놓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냉면을 잘한다고 소문난 곳이라도 한순간에 맛이 달라질 수 있다. 육수는 비슷한데, 면을 어떻게 삶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것이다. 뜨거운 면을 찬물에 헹굴 때 바람이 삭, 하고 들어가야 한다. 육수와 면발, 헹구는 것, 삼박자가 잘 들어맞아야 하는 냉면은 정말 예민한 음식이다.”

최씨는 가장 예민하고 감각적인 음식인 냉면을 ‘첫사랑 같은 맛’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입에 넣을 때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를 단박에 판별하게 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냉면을 만들기가 이만큼 어렵고 까다로운데도, 냉면은 대중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냉면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평생 청바지 만드는 회사를 경영해온 이경렬씨는 “누구나 즐겨 입는 청바지가 계급 없는 옷이라면, 냉면이야말로 계급 없는 음식이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고관대작이든 머슴이든 냉면은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즐겼다. 북한 음식인 냉면이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별미식으로 자리잡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씨에 따르면, 예로부터 냉면은 대중적인 음식인 데다 소화가 잘되어 냉면집에서 팔 때도 국수를 몇 사리나 듬뿍 얹어 준다. ‘정통’ ‘북한식’이라는 광고 문구를 아무리 내세워도 이씨는 일단 국수가 적으면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곳보다 값이 조금이라도 비싸면 ‘대중성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잘한다는 전문점의 냉면 한 그릇 값은 보통 5천원이다).

고려 때 몽골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냉면은, 조선조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른 유서 깊은 전통 음식이다. 냉면이 남한에 뿌리를 내린 것은 한국전쟁 이후. 광복 이전에는 서울에 냉면집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냉면집을 열면서 남쪽 땅에 냉면을 소개했고, 고향을 잃은 이들은 냉면을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냉면 위의 달걀은 언제 먹어야 할까

냉면의 종류는 평양식과 함흥식 두 가지로 나뉜다(북한에서는 함흥식 냉면을 국수라 부르고,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옌볜 지역에서는 냉면을 통칭해 국수라 부른다). 겨울철 동치미 국물에 메밀 국수를 말아 먹던 냉면이 평양식이고, 감자나 고구마 녹말을 주재료로 하는 가늘고 쫄깃쫄깃한 면을 얼큰하고 새콤한 다진 양념과 비벼 먹는 냉면이 함흥식이다. 함흥식에는 홍어·가자미 같은 회를 얹어 먹는다. 냉면은 겨울철 별미로 이름 났지만, 이제는 사계절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냉면을 먹는 법에 대한 속설은 많다. 그 가운데 하나는 냉면 위에 놓인 달걀을 냉면을 먹기 전에 먹느냐 후에 먹느냐, 아니면 노른자위를 육수에 풀어 먹느냐 하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냉면 마니아들은 냉면이 대중적인 음식인 만큼 먹는 법은 따로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겨자나 식초나 고춧가루를 얼마나 치든, 육수를 먼저 먹든 면을 먼저 먹든, 먹는 사람의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면을 먹는 데 지켜야 할 철칙은 있다. ‘절대로 가위를 대지 말 것.’ 면에 쇠붙이가 닿으면 맛이 변하고, 무엇보다 쫄깃쫄깃 씹히는 특유의 맛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