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유통]헌책방 살려야 책이 산다
  • 宋 俊 기자 ()
  • 승인 1998.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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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서점, 근근히 명맥 유지… 유통 합리화 대책 시급
‘헌책방 뒤지기’에 뜻이 맞아 모인 사람들이 있다. 컴퓨터 통신 동아리 헌책방 사랑누리(나우누리·go SHGBOOK) 회원들이다. 매주 한 차례씩 헌책방에서 만나 각자 필요한 책을 고르고, 두 시간 가량 책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다. 두 달이 조금 넘는 동안 이들이 순례한 헌책방은 열 곳이나 되고, 이들이 비축한 헌책방 관련 정보는 공개된 것들 가운데서는 가장 풍부하다고 소문났다. 이들은 매일 컴퓨터 통신을 통해 책을 주제로 삼아 진지하게 토론하고, 사회 문제와 언론의 논조를 질타하기도 한다. 지난 1월7일 발족했는데 벌써 회원이 2백명에 가깝다. 연령층은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헌책 읽기가 안겨 주는 서너 가지 즐거움

책사랑동호회(천리안·go BL)도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은 한국애서가클럽(회장 정성구 총신대 교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애서가클럽의 구성원 대부분이 문인·출판인·교수로서 장서가들이다 보니, 자발적으로 헌책방과 고서점을 돌아보고 관련 정보를 통신에 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 클럽은 이렇게 모은 희귀 장서와 서지 자료 들을 가지고 90년부터 해마다 색다른 전시회를 열어 왔다. 이들이 매년 펴내는 회지 <비블리오필리>도 애서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범우사(사장 윤형두) 사옥에 본부를 둔 한국고서연구회는 희귀본 장서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한 해 활동과 연구 실적을 정리한 <고서연구>가 지난해까지 열네 권이나 나왔다.

전 노동부장관 남재희씨와 번역 문학가 박상준씨(31)는 혼자서 뛰는 ‘헌책 사냥꾼’으로 유명하다. 남씨는 1주일에 두세 차례 헌책방을 찾는 영문 중고 서적 수집광이다. 중학 시절부터 헌책방에 매료된 박씨는 93년부터 컴퓨터 통신에 ‘헌책방 순례기’를 실어 왔다. 수도권 지역의 헌책방 20여 곳부터 프랑스·영국에 이르기까지 박씨의 순례 욕구는 국경을 넘나든다.

이들이 헌책방에 바치는 헌사는 대략 서너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보물 찾기’의 즐거움이다. 오래 전에 태어나 신간 서점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린 책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운 좋으면 귀한 초판본이나 수십·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서적을 헐값으로 손에 넣을 수도 있다. 이같은 횡재는 높은 안목과 오랜 경험에 따르는 대가인 셈이다.

‘은밀한 재미’도 만만치 않다. 어쩌다 책갈피 사이에서 발견되는 해묵은 편지나 메모지, 전 주인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낙서와 결심들, 밑줄 친 부분이 암시하는 지적 성향 따위는 저자와 독자 사이의 대화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게다가 헌책방 주인은 비교적 각박하지 않다. 책더미를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몇 시간 동안 책을 들척거려도 눈총을 주지 않는다. 선 채로 독서하는 것도 허용된다. 낯 익은 단골과는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때로는 술추렴이 뒤따르기도 한다. 묵은 책이 풍기는 알싸한 향기도 공짜다. 커피 한잔, 과자 몇 점이 기본으로 나오는 집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헌책방에서 맛볼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들은, 세계적인 헌책방에 견준다면 하늘과 땅 차이다. 파리 한복판에서 영문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좋은 본보기다. 낡은 건물 1∼4층에 5만여 장서가 빼꼭이 들어차 있는데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책의 영토’이다. 주인은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이 며칠씩 독서·집필·토론을 할 수 있도록 서점 안의 여러 방들을 활짝 개방한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방문객들이 함께 요리하고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풍경도 이 서점의 긍지다. 숙박료는 받지 않으며, 손님이 서점 일을 거들기도 한다.

분야별 전문화도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이다. 런던에는 여성학 전문 ‘실버 문’, 추리 소설 전문 ‘머더 원’, SF 전문(문학·영화·만화 등 망라) ‘포비든 플래닛’ 같은 전문 헌책방들이 줄을 서 있다. ‘시네마 북숍’은 ‘영어로 출판된 모든 영화 관련 서적을 전세계 어디로든 보내 준다’는 모토를 자랑한다. 런던의 업종별 전화번호부에는 헌책방 부문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
외국 헌책방, 관광 명소로 각광

옥스퍼드 중심가의 경우는 안내 책자가 돋보인다. 지도를 곁들여 간략하게 헌책방들을 소개한 책자가 있는가 하면,‘손톤스 서점’은 분야별 카탈로그를 15종이나 비치하고 인터넷으로도 정보를 제공한다.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는 아예 마을 전체가 헌책방이다. 마을 입구의 ‘헤이 관광 안내소’에 헌책방 안내 지도가 비치되어 있다. 마을 곳곳에는 책을 산 손님이 알아서 책값을 요금함에 넣고 가는 무인 책방 ‘정직한 서점’이 있다. 이같은 성가에 힘입어 헤이 온 와이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떠올랐다(82쪽 상자 기사 참조).

일본도 빠질 수 없는 헌책방 선진국이다. 도쿄의 간다(神田) 거리는 소규모 헌책방 밀집 지역으로 △육필 원고 전문 △한정본 및 초판본 전문 △만화 전문 △나라별 서적 전문 등으로 특화했다. 세계적인 헌책방 명소들이 개최하는 고서 페스티벌은 관광 자원으로까지 각광받고 있다.

물론 이들과 한국의 실정을 맞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국민의 독서 경향, 출판 환경, 문화와 교양의 수준 차이가 헌책방의 질적 격차를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의 헌책방들은 96년 1월1일 이전까지는 고물상(제14종)으로 분류되어 경찰서의 허가를 받고 개업해야 했다. 그만큼 책과 세월의 문화적 함수를 읽는 행정 당국의 눈은 감겨 있었다. 헌책방이 서적을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좁아서 엿장수와 고물상의 덕을 톡톡히 본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독서 수요가 좀처럼 늘지 않는 환경에서 경제 성장에 따라 점포 임대료가 급상승하고, 독자들의 취향도 바뀌어 헌책방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살아 남은 헌책방들은 책장을 새로 설계하고 나름으로 책을 분류하며, 부분적이나마 전문화 노력을 기울이는 등 차별화 전략을 추진해 왔다. 예컨대 뿌리서점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가장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양서를 신속하게 순환시키는 비결을 갖고 있다. 골목책방에는 정부 간행물·보고서·자료집 따위 비매품 서적이 유달리 많다. 새한서점은 분류에 정성을 기울여 도서 목록까지 새로 정리했다. 글벗서점은 건축·미술·사진 등 예술 서적 전문화의 길을 모색했다. ‘개미지옥’이라는 별명을 지닌 공씨책방은 학술 서적을 중시하며, 진열한 책의 절반 이상이 외국 서적이다. 중고생 참고서는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 ‘이태원 북 스토어’는 외서만 전문 취급하며, ‘책상은 책상이다’에는 사회과학 서적이 풍부하다. 신고책방은 사회학 분야 책들과 시사 잡지·교양 서적에 신경을 썼다.

책을 분류·정리하기로는 헌책방보다 고서점 쪽이 앞서 있다(흔히 일반 중고 서적을 다루면 헌책방, 한국 전쟁 이전의 서적을 취급하면 고서점이라 부른다). 호산방은 88년부터 장서와 고객을 컴퓨터로 관리해 왔고, 통문관은 지난해 말부터 영상으로 꾸민 관리 프로그램과 서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중이다. 머지 않아 외국 시장을 겨냥해 인터넷 홈페이지도 개설할 예정이다. 범우사가 직영하는 고서점 책사랑은 컴퓨터 통신망을 활용하고 있으며 인터넷 정보 제공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들은 진작부터 책값 정가제를 실시해 왔고, 여러 권의 목록표를 갖추고 있다.

고서점 들은 대부분 희귀본을 보유하고 있어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이지만, 헌책방의 경우는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경영 상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효율적인 헌책 유통 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헌책방을 살리는 동시에 출판사·신간 서점까지 공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어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책이 출간된 후 신간 서점에 머무르는 기간은 대략 2∼8개월 정도다. 예외적이라 해도 2년을 넘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 베스트 셀러를 노린 잡서는 ‘유효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재생지 공장으로 보낸다. 나머지는 경매 방식을 통해 헌책방에 공급된다.
최근의 출판 위기, 헌책방 활성화가 대안

이 방식의 합리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서점은 묵은 책을 바로 처분할 수 있으니 공간 임대료 부담을 덜어 좋고, 출판사는 책의 순환이 빨라져 새로운 책을 서점에 낼 수 있으니 좋다. 헌책방은 경매를 통해 좋은 책을 합리적 가격에 마음껏 구할 수 있어서 좋다. 대신 출간하기 전부터 시장 조사를 철저히 해 거품을 미리 빼는 것이 중요하다. 판매 부수를 명확히 하므로 희귀본 여부도 분명해져 가격이 시장 원리에 따라 적정 수준에서 형성된다. 이같은 시스템은 최근 출판 도매상의 부도가 줄을 잇고 그로 인한 출판사의 연쇄 도산이 우려되는 한국 출판계에 시사하는 바 크다.

헌책방사랑누리의 최종규 시삽은 “시청이나 구청 같은 지방자치단체 단위가 도서관형 헌책방을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라고 제안한다. 유럽식 책방의 장점을 약간만 원용한다면 거액을 들이지 않고도 지역의 명물을 만들 수 있으며, 주민의 복지도 향상시킬 수 있다. 임대료 부담이 없으니 어느 정도의 영리 사업까지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작금의 출판계 상황은 어제 오늘 빚어진 것이 아니다. 10여 년 전부터 뜻있는 출판계 인사들이 누차에 걸쳐 지적해 온 문제가 이제 와서 곪아 터진 것이다. 이에 대해 출판인 ㅇ씨는 “합리적 유통 구조가 절실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을 만드는 맨 처음의 자세다. 자기 출판사의 책이 몇 십년, 몇 백년 뒤까지 전해진다는 각오로 만들어야 유통이며 헌책방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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