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짜리 신도시'평양거리ㆍ건축 집중 분석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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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거리ㆍ건축 집중 분석/철저하게 계획된 50년짜리 신도시
역사학자 강만길씨(고려대 명예 교수)는 고구려 역사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의문 하나를 품어 왔다. 고구려가 왜 중국 지린성 집안(集安)에 있던 넓디넓은 국내성을 버리고 ‘비좁은’ 평양성을 수도로 정하여 옮겼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최근 열린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 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평양 일대를 직접 돌아본 덕분에 비로소 오랜 의문을 풀었다.

그는 평양이 생각보다 훨씬 더 광활한 평야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중심 구역·주변 구역·주변 군으로 이루어진 평양시는 면적으로만 보아도 서울의 3배에 이르며,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그만큼 탁 트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이다. 2박3일 짧은 일정 때문에 평양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평양이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따로 손댈 필요가 없는 천연의 요새지라는 사실도 아울러 확인했다.

조선 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은 일찍이 풍수지리를 논한 그의 책 〈택리지〉에서 평양을 ‘조선 8도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오늘날 평양 도시 경관은 그곳에서 살았거나 최근 방문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텔레비전을 통해 간접으로 평양을 보고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새롭게 재발견되고 있다. 평양은 넓고, 그래서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1997년 9월 귀순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30여 년을 지내며, 건설 기술자로서 평양 도시 개발에 참여했던 장인숙씨(59)는 평양이 자아내는 ‘여유로움’의 근거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평양은 도시 속에 공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 속에 도시가 있다고 얘기되리만큼 녹지를 아름답게 조성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평양을 방문했던 한 중국 건축가는 평양을 방문했다가 아예 ‘화원(花園) 도시’라는 찬탄을 남기고 돌아가기도 했다.

이는 사방이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제멋대로 치솟은 고층 건물군과 아파트에 가려 명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서울과 명백히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서울과 평양 양쪽에서 모두 살아본 장씨는 “확실히 도시 계획 면에서는 평양이 서울보다 낫다. 첫인상부터 평양은 서울보다 훨씬 더 짜임새 있게 만든 도시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라고 말한다.

한때 고구려의 도읍지였고 조선 시대까지도 한양에 이은 제2의 도시였던 만큼, 평양이 서울처럼 유구한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가는 여간 큰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현재의 평양은 50년 전 한국전쟁 때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초토화한 폐허를 딛고 새롭게 출발한 50년짜리 ‘신도시’이다. “차 타고 다니면서 오래된 기와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문화궁전이나 인민대학습당 등 새로 지은 한옥식 건물이 인상적이었다”라고 강만길 교수는 말한다.

북한의 전 주석 김일성과 그의 뒤를 이어 북한의 최고 통치자가 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일단의 주체주의자들은 전래의 전통이 사라진 폐허 위에 사회주의 또는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심고 가꾸려 했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네 경제력이 흔들리기 전인 1980년대까지는 이같은 목표에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내 곳곳에 새로운 거리를 조성하고, ‘사회주의 승리와 우월성’을 알리는 거대한 기념비들을 세웠으며, ‘인민의 편의와 복리’를 위해 극장·도서관·박물관·경기장·체육관·식당·학교를 짓고, 집단 주거 시설인 아파트를 올렸다. 이같은 건축물의 일부는 북한 주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또 어떤 건축물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울은 ‘경복궁-세종로-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기본 축을 도시의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평양은 2개의 중심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중심축은 본평양(구도심)의 김일성광장과,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동평양에 선 주체사상탑을 잇는 가로 축선이다. 부 중심축은 만수대 대기념비와 당창건기념탑을 잇는 또 다른 가로 축선이다.

이 축선을 따라 일찍이 1950년대부터 많은 거리가 들어섰다. 예전에 ‘스탈린거리’로 불렸던 승리거리와 버드나무거리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 거리이다. 1960∼1970년대에는 모란봉거리·천리마거리·서성거리가 들어섰고, 1980년대에는 창광거리와 경흥거리가 재개발되었다. 가장 최근 평양의 건설 붐은 광복거리와 청춘거리를 개발할 때 한 차례 휘몰아쳤는데,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불어닥쳤던 이 건설 붐은 평양을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다(84쪽 지도 참조).

하지만 오늘날의 평양 모습은 1953년 김일성 전 주석이 주도한 내각 결정 제125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내각이 결정한 내용은 ‘대동강을 평양시 도시의 축으로 설정하며 대동강을 따라 구릉 기복 조건에 어울리게 건축물을 배치할 것, 김일성광장을 남산 동쪽 기슭에 건설하고, 대동강과 평행되도록 하류에 공장·기업소를 배치하며, 위생·교육·문화·편의 시설을 균형적으로 들여놓고, 주택지구를 녹화하고 도시 주변에 녹지대를 형성할 것’ 등이다.
이 때 수립된 방침은 그대로 이어졌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평양 도시 개발의 기본 개념은 크게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적 이상’ 대신 ‘주체사상의 이상’이 새롭게 대두한 것이다. 평양을 주체사상의 상징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도시 중심부에 김일성 동상·혁명사적관과 그밖의 기념물을 늘어놓는 것으로 실천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높이 170m에 달해 50층짜리 고층 건물 높이와 맞먹는 주체사상탑이다. 1982년 평양시 대동강구역 주체탑거리에 건설된 이 탑은, 북한 건축을 연구한 건축학자 이왕기 교수(목원대)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에펠탑을 제외하면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그 자체가 평양의 도시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북한의 독특한 기념탑(기념물) 문화는 1961년 세운 천리마기념탑, 1982년에 세운 당창건기념탑 등을 통해 평양 시내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은 상업 중심지를 따라 다핵적인 발전 양상을 보여 중심축이 숨어버렸지만, 평양은 이들 기념물과 기념탑을 중심으로 단핵적인 도심축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고 이교수는 말한다. 이는 이념성과 상징성을 극대화하려는 북한 당국의 주도면밀한 계산에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북한이 비록 사회주의권에서도 유별난 이념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평양에는 이른바 ‘주체주의의 승리’ ‘김일성·김정일 우상화’를 위한 기념물이나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은 오늘날 평양을 인구 1백50만(주변 군까지 합치면 2백50만)에 이르는 전형적인 ‘계획 도시’로 성장시키기까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민족 전통주의 △사회주의 우월성 표현 △조형성 형태주의 △기념탑 건축 등 다섯 가지 다채로운 건축 양식을 선보이며 다양한 도시 개발 실험을 진행해 왔다.

평양의 도시 경관에서 특히 남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김일성이 창안하고 김정일이 계승했다는 이른바 ‘민족 전통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군이다. 이 계열의 가장 초창기 건물은 1960년 8월 준공된 평양대극장과,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참가자들이 찾았고 지난번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남측 수행원들이 점심 식사를 한 옥류관이다.

이들 민족 전통주의 계열 건물들은, 1950년대 말 북한이 사회주의 우방인 옛 소련·중국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등장했다. ‘우리식 사회주의’ 바람이 건축계에도 몰아닥쳐, 이전에 대칭성을 강조하고 거대한 기둥을 세우는 외에 층고를 높였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양식을 ‘교조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독자성을 내세우는 풍조가 번진 것이다. 김일성 정권은 이를 ‘인민의 민족적 정서와 현대적 미감에 맞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로 뒷받침했다.

오늘날 남한에서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민족적 양식 계열의 건축물로는 인민대학습당과 인민문화궁전이 있다. 특히 10층 높이에 연면적 10만㎡를 자랑하는 웅장한 한옥식 건물인 인민대학습당은 김일성 주석이 부지 선정은 물론 기와·처마·공포·서까래 색깔까지 직접 지정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

최근 짓는 건축물엔 ‘김정일 입김’

김정일 국방위원장 치세에 이르러 이같은 민족 전통주의 양식은 변모를 겪게 된다. ‘건축도 하나의 예술이다. 그러므로 건축 창작은 반드시 비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김정일의 건축론이 건축 실무에 강하게 반영되면서 북한 사회, 특히 평양 건축계에 조형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풍미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은 일찍이 1970년대부터 평양 건설에 참여해 왔다. 이 때 이루어진 대형 프로젝트 중 몇몇은 설계에서부터 시공·완공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그가 주도한 것이다. 평양산원(1980년)은 김정일의 지시로 설계를 바꾸고, 규모도 5백 병상에서 1천5백 병상으로 늘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민족적 전통주의 양식을 사회주의 우월성에 창조적으로 접목했다’는 평양 개선문(1982년) 역시 김정일 위원장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에 대응하는 건축물로 1989년 청년학생축전을 위해 만든 5·1경기장은 남북한 양쪽의 건축 전문가로부터 호평을 받는 몇 안되는 평양 건축물. 멀리서 내려다보면 낙하산이 착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건물은, 규모(15만명 수용) 면에서나 발상의 독창성, 즉 조형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장인숙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경기장은 완공 이후 평양 주민으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을 들었다. 아울러 이 건축물은 설계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순수한 북한 기술력으로 지은 것이어서, 지금도 북한 사람들은 이 경기장에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은 이처럼 지난 50년 동안 다양한 양식 실험을 통해 면모를 바꾸어온 도시임이 분명하지만 도시 개발 기간 내내 흔들리지 않은 원칙이 두 가지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교시한 ‘3대 건설 방침’, 즉 설계 표준화·부재 규격화·시공 기계화가 그 중 하나이며, 평양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인구 증감 등 도시 관리에 필요한 사항에 철저하게 ‘통제’ 원칙을 대입한 것이 또 다른 하나다.

마르크스 이래 도시 계획의 확고한 이념으로 확립된 ‘직주 근접’ 개념은, 이왕기 교수가 소개하는 또 다른 평양 개발의 원칙. 이 개념은 ‘근로 인민의 편의’를 위해 직장과 주거를 항상 근거리에 배치하고, 교통량을 줄이며, 일터와 집 사이에 녹지를 조성해 주거 환경의 쾌적성을 높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은 이처럼 전후 폐허였던 평양을 오늘날의 평양으로 이끌어온 쌍두 마차였다. 쌍두 마차는 때때로 북한 주민을 높은 성취감에 젖어들게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쓰디쓴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평양 주민은 한편에서는 호화롭고 웅장한 인민대학습당을 공동 소유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파트 승강기를 돌릴 전력이 모자라 10층 이하에 살 경우 승강기를 쓰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마실 물도 절대 부족해 집안에 물을 받아 놓고 쓰거나, 번거롭게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을 긷는 수고를 되풀이한다.

평양은 또한 남북한 체제 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평양의 도시 경관에는 알게 모르게 이른바 ‘남조선 자본주의’의 체취도 스며 있다.

가장 최근에 지었다는 5·1경기장은 물론 남북 정상회담 때 기자단이 묵었던 고려호텔, 동양에서 가장 높다는 유경호텔(일명 ‘일오공 빌딩’·현재 공사 중단) 등이 한결같이 체제 대결의 산물로 평양의 도시 경관을 변화시킨 건물이다. 고려호텔은 신라호텔과 짝을 이루며, 유경호텔은 6·3 빌딩과 짝을 이룬다. 북한 당국은 서울에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이보다 훨씬 더 층수가 높고 규모가 큰 아파트 단지를 곳곳에 조성했다.

서울이 발전한 모습은 평양의 도시 경관에 ‘본의 아니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모든 건물은 반드시 사상적 배경을 두고 건설한다’는 원칙에 예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최근에는 서울이 평양으로부터 배워야 할 부분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왕기 교수는 “북한에서는 미관·다양성·쾌적성이 항상 강조되는데 이는 서울의 도시 개발에도 참고할 만하다”라고 강조한다. 서울과 평양은 기나긴 적대 관계의 터널을 지난 끝에 이제야 겨우 상대방이 가진 장점을 장점으로 인정할 줄 아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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