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
  • 성우제 기자 (wootje@e-sisa.co.kr)
  • 승인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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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이자 도박이었다" "다음 목표는 평양 공연"


〈심청〉 공연 직후에 만난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서 보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링컨센터 무대에 무사히 안착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 근처 발레 스튜디오에서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녀에게 뉴욕 공연은 말 그대로 꿈과 희망이었다.




"유니버설 발레단을 창단한 1984년께 한국에서 무용을 한다고 하면 '워커힐에서 일하느냐?'고 되물어볼 정도였다. 10년이 지나면서 유니버설 발레단이 한국 발레를 변화시키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문단장은 말했다.


뉴욕의 주류 무대에 서는 데 6년 넘게 준비해 왔으면서도 문단장은 이번 공연을 '도전'이자 '도박'으로 평가했다. 1999년 뉴욕시티센터 공연과 지난해 유럽 투어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본 바닥에서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황색 지젤'이라 불리며 한국을 대표하는 프리마 발레리나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쳐온 그녀에게도 뉴욕은 '살 떨리는 무대'였던 것이다. "〈뉴욕 타임스〉가 우리 주역 무용수를 한 명씩 호명해 칭찬한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심청〉에서 주역을 맡아 눈물까지 흘리는 연기력을 과시한 문단장은 "그것은 숨이 넘어갈 듯한 중노동이었다"라고 말했다. "올해 만 38세인데 단장과 무용을 병행하기가 너무 힘겹다. 무용만 한다면 할 수 있겠는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은퇴설에 대해 그녀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모스크바 무대를 공략하고 〈심청〉을 평양 무대에 세우고 싶다는 그녀는,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특정 종교 발레단도 아니고 개인 발레단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이며, 국민이 살리고 도울 가치가 있는 문화 사업이다. 우리는 돈이 남아서 이렇게 해온 것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직원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나는 죄인이다. '발레 스타 김세연의 1년 토슈즈 값을 대겠다'는 식의 작은 후원이 절실하다."진화론을 믿는 이들에게 약육 강식이나 적자 생존 같은 정글의 법칙은 일종의 상식이다. 한마디로, 이겨야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희생 정신이나 이타심은 인간에게나 고유한, 그나마 아주 가끔씩만 발동하는 고상한 미덕쯤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물들의 사회 생활>을 쓴 리 듀커킨은 아니란다. 야생 동물들에게도 ‘사회’가 있으며, 그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희생과 협동 같은 ‘인간적’ 덕목이 발휘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령, 흡혈 박쥐는 굶주려 죽어가는 동료 박쥐에게 자신의 피를 토해 나누어 준다. 열대어 거피는 적이 나타나면, 잡아먹힐 위험이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둘이 짝을 이루어 정찰에 나선다. 땅다람쥐도 적을 보면 희생양을 자처하고 경고음을 내질러 무리를 대피시킨다. 임팔라영양은 몸에 붙은 기생충을 서로 핥아서 털어내 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그러느냐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이다. 협동하는 동물만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 남는다는 점에서 협동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과 마찬가지로, 속임수를 쓰거나 뺀질거리는 놈들도 있지만, 희생과 협동은 종(種)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데 필수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이유 없는 희생은 없다. 흡혈 박쥐는 이전에 비슷한 도움을 받았거나 같은 동굴에 살아 안면이 있는 박쥐들에게만 제 피를 나누어 주는 ‘선행’을 베푼다. 임팔라영양도 자기 몸을 닦아준 상대를 기억하며, 자기가 받은 횟수만큼만 다른 놈들에게 그대로 되돌려 준다.


저자는 이같은 동물들의 협동과 희생을 가족 역동성, 상호 호혜성, 이기적 팀워크, 집단적 이타심의 네 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의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협동 문제를 동물 세계를 빌려 이야기하는 이 책의 메시지는 물론 집단적 이타심을 지향한다. 진화론 관점에서 볼 때 종의 이익은 개체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종을 위해 내 이익을 포기해야 할 개체가 된다면? 저자의 대답은 없다.


인간에게서 동물을 발견하는 데스몬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나 동물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는 제인 구달의 <희망의 근거> 같은 책을 읽은 이라면, 그래서 무언가 미진함을 느낀 독자라면, 충분히 매혹적인 읽을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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