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급 틀’ 새로 짜야 영화가 산다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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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 구조적 비리 대수술 기대… 왜곡 배급망쮡제작자 위축쮡질 낮은 영화 ‘악순환’
한국 영화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해 온 합동영화사 사장 곽정환씨(66·서울극장 대표) 구속 사건이 영화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검찰이 영화계의 구조적인 비리 전반에 걸쳐 수사 범위를 확대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곽씨가 범행 사실을 부인하자 검찰이 그의 집을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협박 편지를 발견한 것이 수사가 확대될 것으로 알려진 계기였다. 합동영화사의 전 경리 이사가 곽씨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 지적된 곽씨의 비리 내용은 극장 변칙 운영과 탈법적인 영화 배급 수입, 대종상 불법 로비 등에 관한 것으로 알려졌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표 돌리기·번호 같은 표 무더기 발매 횡행

영화인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영화계의 고질적인 난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가장 먼저 극장의 관객 수 조작을 영화계의 고질로 꼽았다. 속칭 ‘마와시’(표 돌리기)라 하여, 관객이 매표소에서 구입한 입장권을 찢지 않고 다시 판매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극장들이 모두 표 돌리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개봉관인 서울 퇴계로 4가 대한극장이 일련 번호가 같은 입장표를 발행해 관객 수를 줄여 오다가 지난해 4월 직원의 신고로 적발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특히 대도시 주변이나 중소 도시의 일부 극장들이 문제다. 아예 입장표에 영화 상영 날짜·회수, 제목, 지정 좌석, 극장명 등 의무적인 기재 항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찍지 않고 판매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은 표 돌리기 같은 고질적 탈법 행위 때문에 한국 영화 시장의 전체 규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식 집계되는 한국의 영화 시장 규모가 약 2천억원이지만, 실제로는 약 3천억원에 가깝다고 본다. 천억원 가량이 일부 극장주의 변태 운영으로 증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배급업자를 끼지 않고 극장주와 직접 영화를 거래하는 미국 직배사 UIP가 국회 국정감사에 제출한 영업 실적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역 극장의 관객 수 비율은 지방까지 합친 전체 관객 수의 약 33%이다. 즉 서울과 지방의 관객 비율이 1 대 2가 된다. 그런데 한국 영화나 간접 배급되는 외화의 경우 통상 서울과 지방의 관객 수가 비슷하게 집계된다. <한국 영화 연감>에 집계되는 공식 통계만 보아도, 최근 몇 년간 서울의 관객 수는 전체의 45%를 넘는다.

김실장은 “이같은 통계 차이는 일부 극장이 그 차이만큼 관객 수를 왜곡한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한다. UIP는 극장에 직접 영화를 배급하는 만큼, 자사의 영업 실적과 직결되는 관객 수를 철저히 감시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극장과 짜고 탈세하다가 적발되면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 규정에 따라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
그러나 워너브러더스·컬럼비아 등 다른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은 영화를 간접 배급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배급업자에게 영화를 단매한다. 단매를 ‘미니멈 개런티’ 방식이라고 부르는데, 영화 판권을 배급업자에게 일정액에 넘겨주는 대신에 영화 흥행 수익에 따라 추가로 이익을 나누어 갖는 배급 방식이다. 문제는 단매 방식으로 영화를 배급할 경우 한국의 배급업자나 극장주가 탈세를 저지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 직배사가 한국의 배급업자에게 영화 한 편을 전국 극장가에 20억원에 팔아달라고 요구했다 치자. 배급업자는 이 영화를 전국 극장가에 총 25억원에 팔아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차액분 5억원을 챙긴다. 직배사가 보통 단매 가격의 20%를 수수료로 지불하므로 배급업자는 추가로 배급 수수료 4억원을 번다. 극장주는 극장주대로 영화를 단매한 미국 직배사들이 UIP처럼 관객 수를 감시하지 못하니까 변태 영업을 할 수 있다.

우진필름 정진우 사장(58 ·시네하우스예술관 대표)은 미국 직배사들이 한국의 ‘배급 카르텔’에 편승하지 않아야 그릇된 배급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법적으로는 영화 제작자와 극장이 거래 주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둘 사이에 배급업자가 암약하고 있어 문제인 것이다.

제작자 ‘문방구 어음’ 받고 필름 넘기기도

심지어 영화 제작자가 배급업자에게 필름을 넘기고 법적 효력이 없는 ‘문방구 어음’을 받는 경우도 있다. 제작자는 배급업자가 극장주에게 필름을 팔아서 현금을 가져온 뒤에 이 어음을 찢는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서 배급업자가 얼마를 차액으로 챙기는지 알 수 없다. 문방구 어음으로 거래한 적이 있다는 한 영화사 대표는 “이런 어음 거래는 배급업자와 신뢰 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영화 제작자는 대개 극장과 5 대 5로 관객 입장 수익을 분배하는데(외화의 경우는 수입업자 대 극장이 6 대 4), 대부분의 경우 광고비를 떠맡는 데다가 흥행 시즌에 서울 사대문 안의 개봉관에 영화를 걸려면 극장주에게 ‘오찌’(개봉 사례금)를 통상 5천만원 가량 지불한다. 그러고도 제작자는 전국의 극장 관객 수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아서 자신의 정당한 수익을 챙기지 못하기 십상이다.

김혜준 실장은 “음성적 배급 구조는 결국 영화 제작자만 고사시킨다. 배급망을 ‘유통 배급업’으로 양성화하고, 극장의 매표도 의무적으로 전산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왜곡된 영화 배급 구조의 폐해는 관객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지금처럼 배급업자와 극장주 사이에서 ‘봉’으로 취급받으면서 어느 영화 제작자가 거액을 들여 ‘회심의 작품’을 만들려 할 것인가. 싸게 먹히고, 유행에 편승하는 질 낮은 영화가 관객의 눈을 어지럽히는 악순환의 고리가 여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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