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근·현대사, 영화로 다시 쓴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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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광주민중항쟁 등 근·현대사 ‘정조준’한 영화 제작 열풍
친일이냐 아니냐, 친북도 문제로 삼을 것이냐 말 것이냐. 과거사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그런데 과거사를 놓고 뜨거운 곳은 정치권만이 아니다. 영화계도 이 문제로 뜨겁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가 영화로 다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 통폐합, 5·18광주민중항쟁, 10·26사건, 인민혁명당재건위(인혁당) 사건, 노근리 학살 등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인물 현대사> 같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소재들이 줄줄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정치권이 과거사 논쟁에 열심인 이유가 ‘여론’ 때문이라면 영화계가 과거사 영화 제작에 열심인 이유는 ‘흥행’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와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끌어모으면서 과거사의 상품성이 충분히 증명된 것이다. 격동의 현대사는 소재 고갈에 허덕이는 한국 영화계에 좋은 돌파구가 되고 있다.

개봉된 <도마 안중근>(서세원 감독, 유오성 주연)을 필두로 ‘김 산 프로젝트’(정지영 감독, 명필름 제작) ‘노근리 프로젝트’(황규덕 감독, 명필름 제작) ‘인혁당 프로젝트’(박찬욱 감독, 모호필름 제작) 10·26 사건을 다룬 <그때 그 사람> (임상수 감독, 명필름 제작) 언론 통폐합 문제를 다룬 까지. 영화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다시 쓰인다.
과거사 문제가 영화 소재로 인기가 있는 것은 가려진 진실이 밝혀지는 것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뜨겁기 때문이다. 광주민중항쟁의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에 관한 영화를 제작 중인 기획시대의 이수남 제작이사는 “실체가 있는 소재를 다룬 작품이 관객에게 믿음을 준다. 무엇보다 현대사 인물이나 사건은 드라마틱하다”라고 설명했다.

영화계가 과거사를 활용하는 방법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옮겨가고 있는 양상이다. 그동안에는 과거사 문제를 ‘간접 화법’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하류인생> <효자동 이발사> <말죽거리 잔혹사> 등은 유신 독재 시절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원경에 배치했다. <살인의 추억> 역시 군부 독재 시절의 우울한 분위기를 배경에 깔았다. 과거사는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어 공포 영화에까지 스며들었다. <인형사>(일제 강점기) <분신사바>(박정희 정권) <알 포인트> (베트남 전쟁) 등이 시대적 배경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이용했다.

그동안 영화가 그린 실존 인물들은 대부분 역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로 재발견한 사람들이었다. 극진 가라데를 창시한 재일동포 최영의씨(최배달)의 삶을 다룬 <바람의 파이터>에서부터 <청연>(최초 여성 비행사) <역도산>(재일동포 프로레슬러) <슈퍼스타 감사용>(삼미슈퍼스타스 투수) <김염>(중국에서 활동한 조선 영화인) <독도 수비대>(민간인 독도 수비대) <꿈의 시작> (1954년 영국 월드컵 한국대표팀) 등의 영화들이 극장에 걸렸거나 제작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요즘 기획되는 과거사 영화는 에돌아 표현하지 않고 격동의 현대사를 정조준한다. 언론 통폐합, 광주민중항쟁, 10·26, 인혁당 사건, 노근리 학살 등 현대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들이다. 윤상원 열사를 주인공으로 한 ‘광주 영화’를 기획시대와 공동 제작 중인 씨에스브라더스의 이성호 대표는 “<꽃잎>이나 <오아시스> 같은 영화에서 광주민중항쟁이 다뤄졌지만 정작 광주민중항쟁 자체는 삽화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번 영화는 광주민중항쟁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이들은 충무로 주류인 386 영화인들이다. 명필름·기획시대·마술피리 등이 제작을 맡고 박찬욱·임상수·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다. 이들이 영화를 통해 과거사를 재조명하려고 하는 이유로 꼽는 것은 바로 사명감이다. 이수남 이사는 “대학 시절부터 윤상원 열사의 삶을 영화화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며 목숨을 내놓았던 그의 고뇌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혁명가 김 산의 삶을 영화화하는 명필름 이 은 이사는 “김 산의 <아리랑>은 우리 영화계에 해묵은 숙제였다. 1980년대부터 많은 영화인이 제작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시대 분위기가 무르익어 이런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영화를 통해 과거사를 재조명하는 것은 영화산업 활황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중국은 장이모우 감독과 첸 카이거 감독이 <붉은 수수밭> <패왕별희> 등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문화대혁명을 재조명했다. 장이모우의 제자로 <붉은 수수밭>에서 주연을 맡았던 강 문은 <귀신이 온다>를 통해 더욱 현대적인 방법으로 과거사를 재조명했다.

북아일랜드 분쟁의 경우, 영화를 통해 뒤늦게 역사의 진실이 까발려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이클 콜린스> <블러디 선데이> 같은 영화를 통해 영국 정부의 폭압적인 지배가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성호 대표는 “격동의 우리 현대사는 영화적 자양분이다. 젊은 감독들이 깊이에 대한 훈련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한국전쟁),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베트남 전쟁),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장선우 감독의 <꽃잎>(광주민중항쟁),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광주민중항쟁), 신상옥 감독의 <증발>(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행방불명 사건) 등이 제작되었지만 이번처럼 여러 편이 함께 제작되는 것은 처음이다.

기획 중인 과거사 재조명 영화들은 작가주의 지향적이었던 지금까지의 과거사 영화들과 달리 대부분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다. 10·26 사건을 소재로 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의 경우 코미디 영화로 그려질 예정이다. 이성호 대표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인 박상연씨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역사적 재난’에 휘말린 사람들에 대한 재난 영화로 기획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블록버스터로 제작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은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상업적으로 만들겠다. 이 영화에서 내가 어떤 예술적 성취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은 철저하게 관심 밖이다. 만들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타 캐스팅을 하겠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해 관객들이 인혁당 사건을 알 수 있도록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사 재조명 영화들이 제작되고 개봉되기까지에는 넘어야 할 벽이 적지 않다. 딱딱하고 진지한 소재여서 영화로 풀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근리 학살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는 명필름의 이 은 이사는 “노근리 사건은 다큐멘터리성이 강해 영화화하기가 쉽지 않다. 시나리오 작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적인 부담도 걸림돌이다. 과거사 영화를 제작 중인 제작사 관계자들은 영화가 정치권의 과거사 논쟁에 말려들까 봐 걱정하고 있다. 10·26 사건을 다룬 명필름의 이 은 이사는 “<공동경비구역 JSA> 개봉 당시에 JSA 전우회가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 애를 먹었다. 무사히 개봉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계 안팎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재조명 영화 제작 열기는 쉽게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 사건 관련 영화를 준비 중인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끝나자마자 기획에 들어갔는데 다른 작품 때문에 계속 늦춰지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만들 것이다. 얼마 전 문정현 신부님을 만났는데 각오를 다지기 위해 꼭 만들겠다고 약속드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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