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사라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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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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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국민 생명과 의료의 장래를 내다보고 내린 결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위기 속에 텅 빈 병원을 지킨 사람은 간호사와 관리직이었다. 또다시 의사들은 환자 앞에 나섰지만 환자들은 예전 같
병원에서 한동안 의사가 사라졌었다. 그리고 그때 기묘하게도 그곳에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한달 전 내가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시장판을 연상시켰던 환자 대기실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의사와 환자를 부르는 긴급 방송도 사라지고,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이동하는 중환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기 검진차 핵의학실 검사실을 찾은 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병원이 늘 이랬으면 좋겠다.”

의사들이 뛰쳐나간 공간에서 정숙·질서·청결이라는 원초적 이미지를 목격하게 되리만큼 한국의 병원은 불가사의한 곳이다. 인술(仁術)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다 하지만 정작 병원을 지배하는 것은 시장의 원리라는 것이 수요자인 환자들의 생각이다.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의 카리스마는 진정 존경으로부터 이룩된 것일까. 조금 잔인한 말로 들릴지는 모르나 직업적 과점 체계와 셀러스 마켓이라는 틀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히포크라테스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의사 쪽이 아니라 실은 환자 쪽이다. 그런 덕목과 정신으로 병을 치료해 주고 목숨을 구해 달라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 60%를 넘어선 텔레비전 연속극 <허 준>에는 이런 사회적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의료 대란의 본질은 ‘밥그룻 싸움’?

의사들이 뛰쳐나간 것을 두고 아무리 질타해도 원대 복귀의 해피엔딩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런 본질에의 착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직업인이며 이익 집단일 수밖에 없다. 의무보다는 권익을 추구하고 밥그릇을 챙기는 시류에서 초연할 수 있는 성인(聖人)들이 아니다. 가령 사회적 압력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히포크라테스나 허 준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번 ‘의란(醫亂) 사태’를 거치면서 사회는 그런 현실적 인식을 키워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각 병원 로비와 대기실에 써 붙인 의사들의 호소문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점이 있지만’이라든가 ‘매스컴은 사안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면서 의사들을 비판하며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번 의란은 일반 국민들로는 알다가도 모를 구석이 많다. 의약 분업에는 의사들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왜 결사 반대인가. 진료권 보장이 안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진료권이 어떻게 침해되었는가. 우선 전문 의약품과 일반 의약품의 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약사들이 처방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에 더 많은 룸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그 구분 작업을 학자들에게 맡겨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중립적이지 못했다는 이야기인가. 학자들이 약사들을 보아주고 의사들에게 불리하게 진료권을 조정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 하나 판정해 내는 전문 기자가 없었을까. 아니면 여기에도 로비가 있었을까. 알 길이 없다. 또 하나, 진료권 분쟁에는 대체 약품 처방권이 걸려 있다. 의사가 처방한 약품 외에 유사 대체 의약품을 약사가 환자에게 처방해 판매했을 경우 그 책임 소재가 의사에게 귀속되는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의사 쪽도 ‘국민 생명에 대한 책임론’으로 명분을 내세운다. 어떤 유사 처방과 어떤 대체 약품에 그런 잠재적 위험이 있는지 일반인들로서는 알 길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언론과 의료계는 의약 분업 원칙을 천명한 지 1년이 넘도록 무엇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국민들은 ‘그게 다 밥그릇 싸움’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대란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낸 말일 듯도 싶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국민 생명과 의료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내린 뼈 아픈 결단이라고 했었다. 그런 갈등과 고민이 아주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의사 앞에만 가면 ‘작아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하얀 가운의 카리스마는 엄청나게 손상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위기 속에 텅 빈 병원을 지킨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와 관리직이었다. 또다시 의사들은 환자 앞에 나섰지만 환자들은 예전 같은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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