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그 몰염치한 공간
  • <시사저널> 취재2부 부장직무대행 ()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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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적이고 배타적인 국회 건물 안에서 국회의원들은 전용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전용 헬스클럽까지 철저하게 분리된 공간을 특권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니 특권 의식과 귀머거리 경향이 싹틀 수밖에 없다.”
공간과 건물의 배치만큼 한 시대, 한 집단의 의식을 좌우하는 것도 드물다. 그것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해서 사람들 의식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한 예로 사랑방과 안방을 매우 떨어지게 배치한 조선 시대 가옥은 남녀의 공간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런 식의 공간 체험이 당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였던 가부장과 남녀 유별 의식에 자연스레 순응하도록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건축물과 공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비단 조선 시대 사대부만이 아니었다. 동서 고금의 수많은 지배자들은‘의식을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만리장성을 쌓아 중원 전체에 위세를 과시한 진시황과 엄청난 규모의 상징물을 세우는 데 심혈을 기울인 히틀러 등은 자신들이 지닌 절대 권력과 배타성을 공간을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이는 직접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열린 공간이었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사오정 국회’의 귀머거리 특권 의식

이제 이야기를 더 돌리지 말고, 우리 국회로 돌아와 보자. 봄부터 국회는 몸살을 앓기 시작하더니 몇 달째 개점 휴업 사태를 계속한 끝에, 13일부터 문을 열었다.
여야 모두 국회 등원에 대해 국민의 뜻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그 깃발 또한 믿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국회를 공전시킬 때는 ‘이제 그만 싸우고 일하라’는 국민의 뜻을 몰랐단 말인가. 필경 싸울 만큼 싸우다 지쳤거나, 조금 더 버텼다가는 도리어 손해 나겠다는 계산속이 나왔기 때문일 터이다. 등원 배경이 이러니만큼, 계산속이 달라지거나 수가 틀리면 또 무슨 명분으로 휴업에 돌입할지 모른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등원하면서도 한켠으로는 원내 투쟁을 위해 들어간다고 장담하는 판 아닌가.

왜 우리 국회와 정치인들은 늘 국민의 뜻과 거리가 먼 짓만 골라 하는가. 왜 국민의 절망과 비판이 국민을 대신하는 그들의 폐부를 찌르지 못하는가. 필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공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다.

우선 우리 국회의사당은 본청 입구의 부조물이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듯이,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크기부터가 매우 관념적이고 허풍스럽기 그지없다. 수행하는 일의 질과 양에 비추어 엄청난 거품이 아닐 수 없다.

국회 잔디밭을 결혼식 장소로 개방하라

그뿐인가. 국회 공간은 무릇 민주주의 전당답게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함에도, 우리 국회의 공간 활용은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이다. 본청은 까마득하게 솟은 수많은 계단에 가려, 정면에서는 입구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가히 스펙터클한 위용이다.

그곳에서 국회의원들은 전용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전용 헬스클럽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분리된 공간을 특권적으로 사용한다. 본청과 의원회관을 연결하는 거대한 지하 통로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수준이라는 국회도서관 이용은 국회의원과‘증’을 가진 사람들만의 몫이다. 국회의 실질적인 주인은 국민인데도 말이다. 이런 배타적인 공간을 체험하니 특권 의식과 귀머거리 경향이 싹틀 수밖에 없다.

핀란드 국회 잔디밭은 일광욕하는 시민들에 점령당하다시피 하는 개방된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잔디밭은 지나가면서 흘겨보기만 해도 단속될 것 같은 금단의 공간이다. 바로 이런 공간 체험이 쌓이고 쌓여 민주 의식의 차이를 낳는다고 본다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정치인을 정죄하는 권리를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면서 국민소환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국민의 공간부터 국민에게 되돌려줄 일이다. 국회 잔디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국회 식당에서 피로연을 갖도록 허용한다면, 가뜩이나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신혼 부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국회 도서관 이용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유용할 것이다. 그 길이 기능이 죽은 민주주의 공간을 살리는 길이자, 길게 보면 죽은 민주 의식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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