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앙웬 감독의〈귀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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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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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자앙웬

주연/지앙웬·지앙 홍보

제작/지앙웬




1945년 정월을 며칠 앞둔 날 밤, 마다산(지앙웬)의 집에 정체 모를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총을 들이밀면서 정월이 되면 찾으러 오겠다며 자루 2개를 맡기고 사라졌다. 문제의 자루를 일본군에게 신고하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놀랍게도 자루 속에는 일본군 포로 2명이 들어 있다. 초비상에 걸린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어서 일단 마다산이 책임지고 포로들을 맡기로 한다.


포로들 중 하나인 일본인 하나야(가카와 데루유키)는 "더러운 중국놈들, 차라리 날 죽여라,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고, 갖가지 욕설을 퍼부으며 자해한다. 하지만 일본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포로인 중국인 통역관 동한천(유안딩)은 "살려주세요"라고 엉뚱하게 통역해 마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춘다.


정월까지만 이들을 숨기기로 한 마다산은 상처를 치료하고 귀한 밀가루로 먹을 것을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일본군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포로들은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갖은 꾀를 다 부린다. 겨우 약속한 날이 왔지만 포로를 찾으러 온다던 이들은 소식이 없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포로들과 협상하게 된다(10월20일 개봉 예정).


김영진이 본〈귀신이 온다〉 ★ 5개 중 4
거대한 공허를 응시하는 배짱




〈귀신이 온다〉는 흥미로운 블랙 코미디다. 일본 점령기의 중국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감독 지앙웬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귀신이 온다〉가 독특한 것은 통칭 5세대, 6세대, 7세대 영화로 나뉘는 중국 현대 영화의 전통에서 홀로 떨어져 나와 있다는 점이다. 지앙웬은 역사를 회한의 스펙터클로 만들었던 5세대의 영화나, 현대 대도시에 사는 중국인의 소외감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스타일의 화법을 오가며 풀어내는 6세대 이후의 감독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지앙웬은 5세대가 화려한 형식미에 비통한 정서를 녹여내 바라보았던 중국의 역사를 훨씬 우화적으로, 그리고 미시적으로 바라본다. 데뷔작 〈햇빛 쏟아지던 날들〉에서 주인공 소년이 겪었던 문화혁명이, 거대한 역사적 격변이라기보다는 소년이 성장하면서 맞는 통과 의례이자 어른들이 벌이는 흥미롭고도 공허한 이벤트이며 아무도 없는 도시 복판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게 만들었던 백일몽으로 비쳤듯이, 〈귀신이 온다〉에 담긴 일본인과 중국인의 관계 묘사는 피아 대립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어느 편이든 똑같이 선악의 본성이 공존하는 몸서리치는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난데없이 그저 '나'라고 표현하는 어떤 사람이 두고 간 부대에 일본군 병사와 그의 중국인 통역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한다. 일본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으며 매일 정해진 시각에 일본군 군악대가 마을을 행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군인지 마적인지 모를 사람이 맡기고 간 일본군 포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을 사람들은 쩔쩔매는 것이다.


매일 한 번씩 군악 연주를 하며 마을을 순시하는 일본군들에게 들키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본군 포로를 잡아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을 사람 전체가 또 다른 포로 신세가 된다. 이 기막힌 감금의 이미지를 블랙 코미디로 끌고 가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차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분을 전하면서도 보고 있으면 몸이 떨리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일본군 포로를 돌려주면서 일본군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벌이던 마을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목불인견의 학살극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 단락의 긴장감은 지앙웬 연출의 정점이다.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하는 이 영화의 구성에는 분명히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독한 현실을 비웃는 초월적인 유머를 바탕에 깔고 있다. 거대한 공허라고 할까. 그러나 지앙웬은 당당하게 그 역사의 공허를 응시하고 있다. 웃으면서 응시하는 그 배짱 덕분에 이 영화는 선악의 주름이 복잡하게 펼쳐지는 걸작이 되었다.


심영섭이 본〈귀신이 온다〉 ★ 5개 중 4
깔깔 웃다가 소름이 '오싹'




줄초상 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려 들면서도 지앙웬 감독은 서두르거나 목을 빳빳하게 세우지 않는다. 똑같이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에 비한다면 〈귀신이 온다〉는 참으로 허허실실하게 사람을 웃긴다. 그런데 전쟁의 귀기 어린 참혹함에 휩싸여 점점 더 악마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있는 등장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종일관 깔깔거렸던 전반부의 웃음이 섬뜩해져 버리는 것이다.


이전의 첸카이거나 장이모 같은 5세대의 영화에 비한다면 6세대인 지앙웬의 영화는 역사를 다루면서도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세부를 놓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귀신이 온다〉도 전반부 1시간 30분 동안을 포로들과 어리숙한 농민들의 심리적 줄다리기에 할애한다.


흑백 영화인 이 영화의 색깔처럼 중국 농민들이 사물을 적과 아군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으로 보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쉽게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살인에 대한 이들의 터부와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경외심이다. 그들의 휴머니즘은 사태를 점점 꼬이게 만든다.


제비뽑기로 자신에게 살인하라는 낙점이 떨어지자, 주인공 마다산은 어떻게든 포로들을 죽여보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깊은 성에 가두고 물도 주고 음식도 준다. 그리고는 자신을 사람 백정 쳐다보듯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엉엉 울며 '자신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귀신이 온다〉의 매력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을 세필로 그려내는 데 지앙웬은 유머와 분노, 선과 악, 혹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무게 중심추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천황의 '항복문서'를 받아들고서도 마을 사람을 학살하는 일본군의 윤리 의식도 천인공노할 것이지만, 마을을 접수한 뒤 무차별적으로 인민 재판을 감행하는 국민당군도 중국 민초들에게는 모두 똑같은 귀신일 따름이다.


지앙웬은 어린 시절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는데, 어른들이 해주는 귀신 이야기는 영락없이 외국인을 귀신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역사상 한 번도 세계의 중심이라는 위치가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중국 인민들에게는 도대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순박한 인지상정의 산물이 귀신일 것이고 보면, 지앙웬 감독의 영화만큼 중국 촌부들의 심성을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도 드문 것 같다.


루쉰의 유머 감각과 쑨원의 역사 인식을 겸비한 지앙웬은 분명 뚝심 있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허락 없이 칸에 영화를 출품하고 일본군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7년 간이나 활동을 정지당했다는 지앙웬 감독. 이 참에 문 밖에 있는 귀신들과 함께 검열 귀신도 이제는 좀 멀리멀리 물러갔으면 싶다. 〈귀신이 온다〉는 바로 그 역할을 해낼 능청스런 부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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