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테이프의 진실 혹은 거짓
  • 박상기(연세대 교수·법학) ()
  • 승인 2002.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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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역사도 바꾼다. 기원 전 210년 지방을 순시하던 진시황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 당시 그에게는 스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장남 부소(扶蘇)가 대를 이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분서갱유에 반대한 장남보다는 멍청한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더 사랑하였다. 늦둥이가 예뻤던 모양이다. 그러나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답게 진시황은 변방으로 쫓아냈던 장남 부소로 하여금 수도 함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장례식을 주관하라는 편지를 써서 환관 조고에게 전달하도록 명했다. 사실상 황제의 자리를 장남이 잇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고는 진시황이 사망한 사실을 두 달이나 감춘 채 승상 이사와 짜고 황제의 자리는 호해에게 넘겨줄 것이며, 부소에게는 자결하라는 내용으로 진시황의 편지를 위조한 다음 부소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부소는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고, 호해는 진시황의 뒤를 이어 2대 황제가 되었지만 곧 조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몇 년 후 진은 망했다.



지금 병역 면제 의혹을 둘러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방전이 한창이다. 양측 모두 사생결단의 자세이다. 여기에 사실 관계를 밝혀줄 것이라는 녹음 테이프가 등장하였다. 녹음 테이프 소지자는 맛만 보이듯이 극히 일부만을 공개해 사람들에게 침만 삼키게 하고 있다. 탈취를 염려해서 녹음 테이프를 묶은 비닐 끈이 마치 얽힌 진실의 꼬리처럼 보인다.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이 녹음 테이프에 대해서 한쪽에서는 조작된 거짓 증거물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병역비리의 결정적 증거라고 보고 있다. 어느 쪽으로 판가름이 나든 정치 상황은 요동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회창 후보는 병역비리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만일 비리 사실이 밝혀질 경우 후보 사퇴는 물론이고 정계 은퇴까지 약속하지 않았는가. 약속을 지킬지는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대통령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병역비리 의혹을 진실 접근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기가 희망하는 결과를 진실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녹음 테이프는 조작된 것이고, 민주당 지지자는 녹음 테이프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리는 중용에 있을지 몰라도 진실은 어느 한쪽에 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진실은 더 이상 사실 관계를 밝혀주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극히 모순되는 사실을 서로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이성적인 의사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병역비리 의혹, 미궁에 빠질 가능성 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더라도 어느 한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기들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활을 건 양측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쓰러지거나 모두 치명상을 입는 상황에서만 결말이 날지 모른다. 그리고 이회창 후보 장남의 병역비리를 둘러싼 끊임없는 의혹 역시 해소되기는커녕 정쟁의 불씨로 계속 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는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정말 힘들게 된다.



홉스의 말은 마치 이러한 한국 정치 현실을 두고 한 지적처럼 들린다. 즉 인간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지만 결국 권력은 인간을 외롭고 비사회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마디 추가한다면,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 땅의 일부 정치인은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한 보호막으로서 정권 장악이 필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관객 처지에서 선택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스스로 흥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진실 게임의 한편이 되거나, 아니면 조용히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섣부른 편들기는 진실 발견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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