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 드라마 <용의 눈물> 김재형 PD “역사의 평가는 준엄하다”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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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을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입니다. 조선 개국은 쿠데타이고, 그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미화될 수 없습니다. 조선 초의 피비린내 나는 뒤틀린 상황을 극복하고 세종의 문치 시대를 열
대하 사극 <용의 눈물>(KBS)이 화제다. 서사적 재미도 재미려니와, 조선 개국 초기의 역사로부터 6백여 년을 뛰어넘어 20세기 말 한반도의 현대사로 치환되어 읽힌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용의 눈물>은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을 쿠데타로 정의하고 드라마를 펼쳐간다. 군사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종전 권력 구조를 ‘싹쓸이’한 이성계, 새 역사의 설계를 놓고 힘을 겨루는 정도전과 이방원,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피의 모자이크를 그려야 했던 야심가들의 부침의 자취는 영락없이 5·6공 주역들의 행적과 닮았다. 게다가 이들이 보여준 암중모색과 이합집산이 최근 발 빠르게 전개되는 대선 주자 캠프의 행보와 절묘하게 대비되면서 드라마는 감칠 맛을 더해가고 있다. 현실 속의 드라마와 드라마 속의 현실이 교차하는 숨가쁜 시대, <용의 눈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용의 눈물>을 통해 무엇을 읽는가. 연출자 김재형 PD(61)를 만나 <용의 눈물>에 담긴 의미를 들어본다. 김PD는 한국 사극의 선구자이자, 평생을 사극 만들기에 바친 ‘사극 역사의 산 증인’이다.

<용의 눈물>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사의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을 그리려 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 세상 아닙니까. 칼로 나라를 일으킨 이성계와 피의 계승자인 이방원, 피비린내 속에서 성장하여 찬란한 문치 시대를 연 세종, 세 거인의 일대기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돌이켜보자는 것입니다.

조선의 개국을 쿠데타로 보십니까?

그렇죠. 쿠데타는 몇백 년이 지나도, 어떤 명분으로도 미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성계나 이방원은 ‘성공한 쿠데타’로 처벌받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역사의 평가가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당대에도 인과응보는 있었습니다. 피로써 나라를 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의 칼날에 다른 자식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 함흥에 칩거했지요. 그 속이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그 골육상잔의 비극이 세조 이후까지 반복되지 않습니까?

연출자로서 <용의 눈물>에 담고 싶었던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시청자로 하여금 민족의 자긍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만들자, 이것이 평생 사극에 매달려온 제 정신입니다.

피로 얼룩진 권력 찬탈의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느낀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뒤틀린 상황을 딛고 세종대왕의 찬란한 문치 시대가 개막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민중의 힘입니다. 피의 역사를 견제하고 견디어낸 민초들의 힘, 그 민심이 세종으로 하여금 문치의 길로 가게 만든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이면을 극중에 우러나게 하고자 애를 많이 씁니다.

PC 통신을 보면 시청자의 반응이 대단합니다. 대부분이 갈채를 보내는 글이지만, 이성계·정도전·이방원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미화한 측면이 있지 않느냐는 항의성 질의도 나왔습니다.

악역은 악한 면을 부각하고 주역은 더 멋지게 치장하고…. 오히려 그런 공식이 사람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요? 이성계와 이방원은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이었고, 그 카리스마가 조선 왕조 5백년의 터전을 닦은 것입니다. <용의 눈물>은 그들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는 드라마입니다. 악행은 악행대로, 인간적 매력과 개성도 있는 그대로 그릴 생각입니다.

미화했다는 항의 가운데는, 드라마 주인공의 행적을 옛 기록과 다르게 그리면서까지 개성을 멋지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정사뿐만 아니라 야사 내용도 적극 수용하려 합니다. 실록 저자들은 임금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관이라는 처지에서 선대의 행적을 얼마나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그렸을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그런 기록들은 후대로 갈수록 가필을 통해 성화(聖化)되기까지 했습니다. 야사에도 진실이 있습니다. 다만 정사로 채택되지 못했을 뿐이죠.

<용의 눈물>은 어느 임금까지 다룰 계획입니까?

세종이 붕어(崩御)하는 장면까지입니다.

세종 시대는 태평성대여서 태조·태종 때보다 박진감이 덜할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세종을 성군으로 그린 작품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인간 세종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그릴 생각입니다. 세종은 피를 보면서 성장기를 보낸 인물입니다. 아버지 태종의 명령에 외숙이 죽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즉위를 둘러싼 양녕·효령 대군 두 형의 행적도 쓰라린 기억입니다. 그 내면에 어떤 소용돌이가 도사리고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있는 그대로, 자료에 밝혀진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다룰 작정입니다.

조선 개국 당시의 정치 상황과 대선을 앞둔 최근의 정치 판도를 비교하면서 드라마를 즐기는 시청자가 많습니다. 방영 시기도 대선과 절묘하게 맞물리는데, 의도한 결과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용의 눈물>이 무슨 정치 드라마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지요. 조선 개국을 사극으로 그려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박종화 선생의 소설 <세종대왕>을 읽고나서였습니다. 70년대에 소설 <세종대왕>이 일간지에 8년간 연재되었는데, 하루도 걸르지 않고 그걸 다 읽었습니다. 기막힌 소재였어요. 언젠가 꼭 제 작품 목록에 올려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왜 20년이나 미루셨습니까?

박정권·전정권 때 위화도 회군, 왕권 찬탈, 1·2차 왕자의 난 같은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방영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당시는 북한산 쪽으로 카메라를 향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청와대 쪽이라고요.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요.

40년 가까이 사극에 전념해 왔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62년에 만든 <국토만리>가 사극의 효시였지요. 한참 하다 보니까 생각이 온통 6백년 전에 가 있고 천년 전에 가 있고, 과거에 빠져 현실 감각이 엉망이 돼버렸지요. 사표를 냈더니 현대극을 맡깁디다. 그때부터 <서울이여 안녕> <딸> <엄마의 일기> <달동네>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현대극을 하다 보니까 밤낮 밥상 놓고 밤낮 사랑하고 헤어지고…, 똑같은 유형의 스토리에 식상하게 됐어요. 그래서 사극으로 다시 돌아왔지요. <별당아씨> <사모곡> <왕도> <한명회> 등 사극만 2백50편 가까이 만들었습니다.

사극 하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옛 모습 찍을 데가 없어요. 전통 풍경과 고유 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유적지는 철제 안내판이 거슬리고. 민속촌에나 가야 초가집이 있는데, ‘호남 가옥’ ‘무슨 가옥’ 하고 안내 팻말이 가로막아요. 대개는 그걸 돗자리로 가리고 찍는데, 아이들이 사극을 보다가 ‘아빠 드라마에는 왜 집집마다 돗자리를 말아놨어요?’ 그럽디다. 그나마 문화재관리국이 달라져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여기서 찍어라’ ‘여기는 안된다’ 그랬어요. 특히 밤 촬영은 꿈도 못꿨습니다. 밤에 궁궐에서 이뤄진 역사는 건너뛸 수밖에요. 문민 정부 들어서 바뀌었는데, 이것이 사극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역사·문화의 요소도 풍부해지는 것이고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KBS가 <조선왕조실록>을 차례로 드라마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압니다. 사료적 가치도 크지요. 개인적으로는 고려사를 완결하는 게 소원입니다. 왕건부터 삼별초를 거쳐 공양왕까지. 그때까지 기력이 버텨주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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