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여성부장관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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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보호 강화하면 여성 취업도 늘 것"


"저는 여성들에게 이제는 직업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직업은 더 이상 교양이나 자기 계발 수단이 아닙니다. 여성도 이제는 남성과 동등하게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한명숙 여성부장관(57)에게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은 '감격 시대'이다. 사회가 아주 조금만 나은 방향으로 바뀌는 조짐이 있어도 그녀는 벌써 감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헌정 역사상 최초로 여성부가 탄생하던 지난 1월29일, 한 장관과 그녀를 배출한 여성계는 다같이 감격에 취했었다. 그로부터 넉 달, 한장관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있다. 모성보호법 파문을 전후해 '여성부는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장관의 솔직한 답변을 들어 보았다.




장관 취임 이후 바지 입은 모습을 대중 앞에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성 정치인은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통념을 여성부장관마저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치마 쪽이 아무래도 정장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입는 것입니다. 출범 초기인데, 괜히 트집 잡힐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그런데 실은 저, 공식 석상에서 바지도 가끔 입습니다.(웃음)


여성부가 제몫을 못해내고 있다고 벌써부터 불평이 나오고 있습니다. 장관께서 의원 시절 발의하셨던 모성보호법 개정안마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저도 그 부분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가 만나 보니, 재계 관계자들도 모성보호법을 개정할 필요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한술 더떠 출산 휴가를 14주 정도는 줘야 한다고 지적하는 분도 있었어요(개정안은 12주). 단 재계는 여성계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여성부가 너무 속도를 낸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따지고 보면 개정안에 들어 있는 유·사산 휴가 등은 이미 행정 지침으로 실시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법제화가 어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최하위 수준에 있는 한국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런 데서부터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은 모성을 보호하기보다 여성의 일자리를 늘리고 보전하는 것이 더 급선무가 아닌가요?


모성 보호를 강화하면 기업들이 여성 채용을 더 기피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많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단기적인 사고입니다. 선진국을 보세요. 모성 보호가 강화되어 있고, 육아 정책이 잘돼 있는 나라일수록 여성 취업률이 높습니다. 우리도 여성들이 일하는 데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끔 제도를 만들어 가야죠.


재계가 주장하는 대로 출산 휴가 대신 생리 휴가를 양보할 의향은 있습니까?


대상자가 10만∼15만 명인 출산 휴가와 달리 생리 휴가는 3백50만 여성 근로자 전체의 문제입니다. 임신한 일부 여성의 휴가와 전체 여성의 휴가를 맞바꾸자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닐까요? 게다가 노동부도 지적했다시피 생리 휴가는 임금 보전 수단이라는 성격이 강하죠.


그렇다면 생리 수당을 받을 수 없는 남성 근로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의 남녀간 임금 격차는 아직 심각합니다. '여성의 가치는 남성 절반 값'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1980년대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지만, 2000년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1% 수준입니다. 아직까지 남성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군 가산점 파동 이후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남성이 크게 늘었습니다. 여성부가 출범한 데 대해서도 딴죽을 거는 남성이 의외로 많던데요.


여성부의 역할에 대해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성부가 성차별 등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성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문은 여성 인력 개발입니다. 그간 여성들에게 남성 의존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렇게 만들어 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여성들에게 이제는 직업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직업은 더 이상 교양이나 자기 계발 수단이 아닙니다. 여성도 이제는 남성과 동등하게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남성이여, 짐을 같이 나누자" 이겁니까?


그렇죠. 그 무거운 짐을 왜 남성 혼자 고달프게 지고 갑니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가장 한 사람이 가계를 통째로 책임지는 '1가계 1직업' 체제에서 '1가계 다직업' 체제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성부가 생김으로써 오히려 여성들이 더 고달퍼지게 생겼습니다.


자유라는 게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과 동등한 권한을 쟁취하는 것 못지않게 책임도 동등하게 져야 합니다. 21세기 여성부는 '피해자로서의 여성'보다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여성'의 모습을 적극 부각할 것입니다. 단 아직까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으니까, 한편으로는 성차별을 개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는 양 날개를 유지할 것입니다.


군 가산점 파문 이후 여성에게도 징병 의무를 부과하자는 주장이 등장했는데요.


군 가산점 제도는 분명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여성부도 군을 다녀온 남성에 대한 사회적인 보상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산점 방식은 말이 안됩니다. 여성에게 징병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분단 현실이 엄존하는 한 안보 태세는 철통같이 지켜져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남북이 평화 공존 체제로 가게 되면 징병제 자체를 재고하게 될 것이니, 여성의 군 입대 문제는 그때 가서 거론해도 되지 않을까요?


남성과 동등한 책임을 지겠다는 여성들이 군대에 굳이 가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단계적으로 접근해야죠. 여성부는 우선 군대 내 여성 인력을 대폭 늘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ROTC에 여성 참여도 요구하고 있고요. 국방부 반응도 긍정적입니다. 장관 말씀이, 비리 소지가 많은 부서에 여성 인력을 배치했더니 비리가 크게 줄었다고 해요. 얼마 전 국군간호사관학교를 폐지한다고 해서 말이 많았는데, 여성부가 이 문제에도 적극 개입해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직원 1백2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부처인 여성부가 그 많은 기대를 소화해 낼 수 있겠습니까?


특별위원회에서 부로 승격한 만큼 갖춰야 할 부서가 많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2001년 여성 관련 예산이 전체 예산의 0.69%인데요. 하루빨리 적정한 인원과 예산이 확보돼야 할 것입니다. 여성부는 또 특성상 부처 별로 분산된 업무를 관장·조정하는 업무가 많은데, 여성 문제에 대한 이들 부처의 이해도가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각 부처 실·국장급 중에서 여성 정책 책임관을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언론 매체로부터 사상 검증을 당하셨다고 하던데요?


뭐, 사상 검증이라기보다, 그냥 색깔론을 들이댄 것이었는데요(최근 〈월간 조선〉이 한장관 인터뷰에서 남편인 박성준 박사의 통혁당 전력을 캐물은 바 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제가 아닌 남편의 사상을 문제 삼느냐는 것이었어요. 언론들이 남성 장관을 인터뷰할 때면 소관 업무에 대해 묻지, 가정사를 시시콜콜 묻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왜 여성 장관한테는 머리 스타일·옷차림처럼 주변적인 문제를 물으며 선정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인지…. 이런 것들이 일종의 성차별 아닐까요.


● 프로필 :

1944년 평양 출생.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제16대 국회의원(민주당).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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