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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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 총장 · 대변인 다 없애라"
정동영 하면 '쇄신'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지난해 12월 '권노갑 퇴진론'을 제기한 이래 늘 쇄신파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제도를 뜯어고쳐 보겠다며 지도부와 각을 세우고 있다. 12월12일 대규모 후원회를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정동영과 함께 정치 혁명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그는 후원회 날 대권 도전을 선언하겠다고 강력하게 시사했다.




11월28일 워크숍에서는 3월 전당대회론이 우세했다. 대세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쇄신 논의의) 본질은 전당대회 시기가 아니다. 당내에 현상 유지냐 현상 타파냐가 맞붙어 있는데, 나는 현상 타파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난 워크숍에서는 전당대회 일정이 마치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인 양 지나치게 기술적인 논의에 치중했다.


워크숍을 주관한 특대위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발제도 어떻게 해야 사느냐를 먼저 제시했어야 한다. 특대위가 뭔가.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위원회 아닌가?


어떻게 '현상 타파'를 해야 하나?


당의 민주화·현대화를 위해서는 뼈와 태(胎)를 바꾸는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당이 내놓는 대안은 화장을 고치자는 정도다. 우선 총재·총장·대변인을 다 없애야 한다. 총재가 뭔가? 바로 공천·인사·재정·정책을 다 틀어쥔 1인 카리스마의 상징 아닌가? 총장을 없애자는 것은 중앙당의 기능을 축소하고 정책 중심을 당에서 국회로 옮기자는 것이다. 정작 법안을 다루는 상임위원들은 제쳐두고 당 정책위원회가 당·정 협의를 하는 것이 말이 되나? 또 쇄신연대 토론회에서 누군가 '부대변인은 매일 텔레비전에 나와도 국회의원은 나오는 경우가 없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에 공감이 가더라.


총재를 없애면 당은 누가 이끄나?


선출직 지도부가 최고 의결기관 노릇을 하면 된다. 지도부를 '대충 5∼7명쯤 뽑으면 되겠지'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숫자가 적으면 권력이 집중되므로 소속 의원을 잘 대표할 수 있도록 15명쯤을 지도부로 뽑아야 한다. 대표는 그 안에서 호선해야 견제가 가능하다.


자꾸 '국회 중심'을 강조하니까 원외 위원장들의 반발이 심하다.


국회 기능을 제대로 살리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원외를 소외시키자는 게 아니다. 사실 미국식으로 하면 지구당도 다 없애야 한다. 하지만 당장 지구당을 없애는 것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후보를 뽑는 데 구 당원말고 지식인·주부·청년 등 방관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예비 경선제를 말하는가?


상향식 민주주의를 하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하는데, 일반 시민 눈에 정당 주변 인물은 다 건달쯤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 당원만 가지고는 국민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없고, 지식인·화이트칼라·주부·청년 등 방관자들이 다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내 손으로 직접 정당 지도부를 뽑고 대통령 후보도 뽑는다'는 반대 급부가 있다면 많이 참여하지 않겠는가.


너무 이상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두 가지 예를 들겠다. 우선 정대철 고문이 약수동 구의원을 뽑는데 후보를 경선하겠다고 했더니 전체 구민 6천명 가운데 2천명이 투표했다고 한다. 등록된 당원은 8백명뿐이었는데, 일반인이 당원 수보다 훨씬 많이 참여한 셈이다. 예선에서 탈락한 구 당료가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구민 지지를 받은 예선 1등자가 압승했다. 또 하나 1999년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지지도 10%대에서 허덕이던 집권당이 80년간 후계자를 지명하던 관행을 깨고 예비 경선제를 도입해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정권을 내주기는 했지만 야당과 접전을 벌일 만큼 인기가 올랐다. 우리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은가?


3개월이면 충분한데, 당 지도부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죽어야 산다고 하면서 진짜 죽을 생각은 없는 게 문제다. 그래서 이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1월에 쇄신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뽑자는 것이다.


한광옥 대표의 중립성을 놓고 말이 많다. 경선에 참여하려면 즉각 대표 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관리 체제는 철저하게 중립적이고 공정해야 신뢰받을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두자.


쇄신 파동은 정고문이 지난해 12월 권노갑 퇴진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당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가?


고문 고문 하지 마라. 꼭 남의 옷 입은 것 같다. 영어로 어드바이저던데, 아예 그렇게 부르든가.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민심'이 최고 기준이다. 민심에 따라 권고문이 물러나 주기를 건의했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0·25 선거 패배로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인적 쇄신을 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권 전고문은 내년에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하겠다고 한다.


당과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있다고 본다. (권 전고문은) 역할이 드러날수록 당에 부담을 준다.


"권노갑 전 고문이 물러나지 않아 10·25 선거에서 졌다. 인적 쇄신을 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다."


동교동 구파로부터 견제가 심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인간적으로 내내 부담스럽고 편치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흔들린 적은 없다. 나는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한 번도 등 돌린 적이 없다. 남들은 나보고 양지 쪽만 걸었다고 하는데, 철 들고 편한 해가 거의 없었다. 내게 비난이 쏟아져도 내가 걸어온 길이 옳았다고 본다.


12월12일 후원회에서 대권 도전을 선언하리라는 소문이 있다. 사실인가?


그때 가서 보자. 당분간은 쇄신을 위해 전념해야 할 때고, 내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동교동 구파는 정고문이 '사심'이 있어 자기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얼마 전 필리핀을 다녀오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매일같이 '넌 얼마 먹었느냐'는 식의 부패 스캔들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지만, 필리핀 대학생들이 그런 상황에 대해 한번도 분노하거나 봉기한 적이 없다는 점이 필리핀의 미래를 어둡게 했다. 한국은 그나마 낫다 싶으면서도 역시 나라의 운명은 정치가 좌우한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지금이야말로 정치의 물꼬를 확실히 바꾸는 혁명이 필요하다. 이 얘기를 후원회원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한화갑 고문이 호남후보 불가론에 발목이 잡혀 있다. 정고문도 예외는 아니지 않은가?


런던 대학 교수인 모리시마 미치오는 '결국 정치가 일본을 망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은 글로벌로 가는데, 정치는 사소한 지엽 말단에 발목이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물줄기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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