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무예’ 되살리는 거리의 부처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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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 아우른 ‘풍류도’ 전수자 원광선사/“풍류도 세상에 나오면 국운 융성”
치원이 도선국사에게 물었다. “풍류도가 뭡니까?” 도선국사는 “풍류도란 이것이다”라며 두 주먹을 눈 앞에 번쩍 쳐들었다. 바로 태공유수(太空有水)의 자세다. 최치원이 엉겁결에 따라 했는데 2시간이 못 가 주저앉고 말았다. 하염없이 자세를 잡고 있는 도선국사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산같이 느껴졌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천재 유학자. 한편으로는 동방선도(東方仙道)의 조종(祖宗)으로 받들어진다. 당대의 선풍을 증언한 한 줄기 문장 때문. 그가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남긴 `‘國有玄妙之道曰風流, 包含(儒佛仙)三敎’라는 문장은, 바로 신라의 화랑들이 고유의 풍류도를 수련했으며, 풍류도는 유불선 삼교를 아우르는 현묘한 도라는 것을 증언한 것이다.


당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바탕에는 화랑이 있었고, 화랑도의 바탕은 풍류도(또는 風月道)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중원으로 뻗어가고 백제가 해상 왕국을 건설한 동력도 바로 당시 삼국을 풍미한 풍류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풍류도에 대한 문헌 서술은 최치원에서 그쳤다.


풍류도는 정말 사라져 버렸나. “봉황을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사람들은 없다고 하지.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봉황춤을 추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 원광선사(圓光禪師). 속명은 손은식(孫垠植). 50대 후반인 그는 종로 인사동의 ‘유명 인사’다. 10여 년째 한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그를 사람들은 노상불(路上佛)이라고 한다. 그의 하루는 오전 12시께 서울 종로1가 조계사 앞에 `‘출근’하면서 시작된다. 오후 3시면 어김없이 인사동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법당’이라 일컫는 조그만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축원을 한다. 자작 시집을 팔기도 하고, 신명이 나면 수준급인 대금·단소 실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지난 10년간 그는 사람을 기다려 왔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조선 내공법’ 풍류도를 이어갈 인연 있는 제자를 기다린 것이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오후 6시면 어김없이 광화문에 있는 경희궁터를 찾는다. 시립미술관 뒤 넓은 뜰이 바로 국내 유일의 풍류도 수련장. 풍수학상 용의 꼬리인 이곳의 기운이 왕성하다고 한다.

권법과 무기술 ‘초식’ 수만 수


해거름이 뉘엿뉘엿 질 6시께, 사람들이 모여든다. 남녀노소 합쳐 30명 남짓. ‘사부’에게 예를 올리고 자세를 잡는다. 바로 태공유수다. “태공유수는 고조선의 전설적 존재인 금강8인(金剛八人) 중 한 분의 이름이자 그 분이 즐겨 잡았던 자세이기도 하지.” 고수들은 반태신공(半太神空)·고족신명(高族神明) 등의 자세를 잡는데 이 역시 금강8인에서 유래했다. “발은 나무의 뿌리와 같고, 몸은 나무의 기둥과 같고, 팔은 나무의 가지와 같다.” 그가 제자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는 소리다.


왜 서서 수련할까. “인도는 덥기 때문에 앉아서 꼬고(坐禪), 춘하추동 사계가 뚜렷한 우리 백두산족은 서서 꽈야 한다(立禪).” 좌선을 하면 하단전에 기가 모이나 그 대신 땅기운, 즉 수기(水氣)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좌선 수련자들이 주화입마에 걸린다고 한다.

한 시간의 자세 수련 후 잠깐 몸을 풀고 무예 수련에 들어간다. 초보자는 풍향권(風香拳), 고수들은 대설장권(大雪長拳), 한쪽에서는 봉술 수련이 한창이다. 삽시간에 군무의 장관이 펼쳐진다. “아직도 멀었어.” 10년 세월이 흘렀으나 스승이 전해준 장대한 무공의 한 끝자락조차 아직 내놓지 못했다. 풍류도는 내공에 기초를 둔 무예다. 내공은 자세에서 비롯하는데, 기본 자세만 해도 32개. 변형 자세까지 합치면 72개다.




권법은 춘하추동에 맞게 춘화권(春花拳)·하림장권(夏林長拳)·추월권(秋月拳)·대설장권(大雪長拳)이 기본인데, 각각 3천 수가 넘어간다. 대설권 하나만 해도 3천3백3 수. 전부 펼치려면 3시간은 족히 걸린다. 중국이 자랑하는 태극권이 기껏해야 1백8식인 데 비하면 놀라운 경지이다. 10년을 수련한 고수가 아직 대설장권 하나를 붙잡고 1천 수 정도에 머물러 있으니 그의 말이 수긍이 간다. 이밖에 연개소문이 수련했다는 대력진권(大力進拳)·오행태극권 등 1천 수가 넘어가는 권법들이 수두룩하다. 또 사명대사의 칠성검법, 진묵선사의 칠현방검·태을검·무염검·비룡검 등 검법과 18개 무기술 등은 아직 선도 못보였다. “풍류도는 30년 공부지. 3년이면 소성, 10년이면 대성, 30년이 돼야 완성된다.”


최치원이 말한 현묘지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단 말인가. 어려서 몸이 약했던 원광선사는 1952년 여름, 일곱 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태백산 도인 청운선사(靑雲禪師)에게 맡겨졌다. 속명이 박세영(朴世永)으로 평안도 사람이었던 스승은 40여 년간 그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광개토대왕·원효대사·서산대사 ‘고수’

풍류도는 고조선 시절 백두산의 조의선사에게서 발원해 금강8인에게 이어졌다. 고구려에서는 광개토대왕·을지문덕·양만춘·연개소문이 풍류도의 고수였다. 신라에서는 도선국사에서 최치원으로, 대안선사에서 원효대사로, 그리고 무수히 많은 화랑들이 이를 수련했다. 고려 때까지 무인들이 이를 수련했으나 조선 시대 태종 이방원이 무인을 탄압할 때 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부터는 무학대사의 스승 장원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조선 말의 진묵, 벽송선사 등 고승들이 은밀하게 맥을 이었다.


“풍류도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국운이 융성했지. 그러나 조선이 이를 버리면서 나라가 결딴 나 버렸지.” 새로운 국운의 융성을 예감한 것일까. 원광선사가 스승의 비전을 세상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반도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배종렬 박사(수출입은행 선임연구원)가 ‘`사부’와의 대담을 토대로 도학 소설 <삼천갑자동방석(상권)>을 지난 12월15일 내놓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32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어 간다고 하니 그 첫 발자국에 불과한 셈이다. 배박사는 ‘삼천갑자동방석연구회’도 결성해 인연 있는 사람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왜 삼천갑자동방석인가. 우리 민족의 신화적 존재인 동방석을 중국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듯이, 우리 무예의 뿌리 역시 중국으로 알고 있는 사대주의적 세태를 질타하기 위함이다.


자작시 <석양>을 보면 그의 행색이나 심경이 동방석을 연상케 한다. ‘옷모양 벌레같이 포장하고/속마음 선비같이 살려 하네/세상에 지는 해를 잡을 길 없어/오늘도 한해가 넘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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