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분교에 차린 소박한 잔칫상
  • 고성·오윤현 기자 (noma@e-sisapress.com)
  • 승인 2002.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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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음악회’ 막 내리는 가수 예 민씨/“준 것보다 받은 게 많아 행복”
<아에이오우>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히트시킨 예 민씨(36)는 도시 아이들에게 그리 낯익은 가수가 아니다. 그러나 두메 산골과 섬 마을 아이들에게는 장나라나 보아보다 훨씬 더 인기 있는 가수이다. 껑충한 키와 해맑은 미소, 고운 노래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들이 다니는 ‘작은 학교’(분교)에 찾아온 유일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예 민씨는 지난해 9월20일부터 10명 안팎의 학생이 있는 분교를 찾아가 ‘작은 음악회’를 열어왔다.


그가 작은 음악회를 구상한 것은 5년 전이다. 당시 그는 한 텔레비전의 <그곳에 가고 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강원 평창의 입탄분교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 아이들과 개울가에 앉아 물장구치며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불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노래에 나오는 풍경(…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흐르는 냇물 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깊은 감동과 함께 행복감을 느꼈다. “그때, 언젠가 산골 아이들에게 노래로 꿈과 희망을 키워주리라 마음먹었지요.”






시작은 쉽지 않았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가수가 음악회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부터 치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원자들의 응원을 받으며 이곳저곳의 문을 두드린 끝에, 지금까지 1백23개 분교에서 꿈나무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돌이켜 보면 내가 아이들에게 준 것보다 받은 게 훨씬 많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1백23개 학교 찾아 꿈나무들과 대화


7월3∼4일. 그는 마지막 작은 음악회를 광산초등학교 흘리분교(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와 구성분교에서 가졌다. 3일 낮, 흘리분교 아이들 17명은 책상과 의자를 교문 옆 낙엽송 그늘에 옮겨놓느라 분주했다. 아이들은 낯빛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힘든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들뜨고 기꺼운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 민 아저씨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쁘기는 예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교실로 돌려보낸 뒤 책상 위에 새하얀 식탁보를 씌우고, 익숙하게 키위와 오렌지를 깎았다. 그런 다음 쿠키·체리 열매와 함께 접시에 담아 정성껏 테이블에 올렸다. 잠시 뒤, 교실에서 마임 배우 배인호씨(32)의 공연을 본 아이들이 찧고 까불며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아이들에게 초대장을 나누어주며 눈을 맞추었다. 아이들은 쑥스러운지 연신 키득거리며 눈맞춤을 피하려고 했다. 한 여자아이는 ‘으으, 으∼’ 하고 비명까지 질러댔다.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예씨는 “테이블 맘에 들어? 너희들을 위해 가장 신선한 과일과 갓 구운 쿠키를 마련했으니까 맛있게 먹고, 좋은 추억 만들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이름과 장래 희망을 물어 이름표를 만든 뒤, 아이들 가슴에 달아주었다. 새콤달콤한 과일을 삼키는 아이들 입 끝이 자주 방긋거렸다. 그 사이 예씨는 아이들 컵에다 ‘냉구름코코아’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선생님보다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사가 꿈인 대웅이(2년)가 “세상에서 처음 먹는 맛이에요. 우리 엄마보다 나아요! 매일 와서 해줘요”라고 외쳤다. 그 바람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파티를 끝내고 예씨는 아이들을 교실로 이끌었다. 잣나무의 잔가지가 창가에 와 닿는 교실에 둥글게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커다란 상자에서 장고처럼 생긴 작은북을 꺼냈다. “이건 아프리카의 말하는 북이야, 자 뭐라고 하나 들어봐!” 그가 북을 둥둥둥둥 두드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안녕하세요에요!” 그가 “맞아! 어떻게 알았어?” 하고 칭찬하자 아이는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가 다시 둥둥, 둥둥 하고 북을 치자 아이들이 일제히 “안녕, 안녕이에요!” 하고 입을 모았다.


그는 마치 마술사 같았다. 등을 돌리고 상자에 손을 넣으면 이상한 악기가 계속 달려나왔다. 파도 소리가 나는 북, 비 오는 소리가 나는 막대기, 우툴두툴한 등을 긁으면 두꺼비 우는 소리가 나는 ‘목탁’, 염소 발톱으로 만든 악기, 버팔로 턱뼈로 만든 딸랑이, 거대한 콩을 말려 만든 악기, 소라로 만든 나팔, 사람의 뼈로 만든 피리…. 연신 땀을 닦으며 그는 그 악기들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건넸다.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금세 악기를 불거나 두드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언제 왔는지 학부모들이 창가에 서서 ‘이상하고 아름다운’ 음악회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 보았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독창 무대. 그런데 애당초 독창은 그른 듯싶었다. 그가 기타를 들고 나타나자 아이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아에이오우… 길을 가다가 우연히 접어든 학교담 너머로 들리는 노래 소리….’ <아에이오우>를 합창한 뒤 그가 조용히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부르자 아이들도 화음을 맞추었다.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그대 노을 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 모자 씌워주고파…’


음악회 일정 끝나면 미국 유학 예정


예 민씨가 노래를 끝내고 악기를 챙기자 아이들이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북과 장고, 그리고 꽹과리와 징을 이용해 한판 신명 나는 사물놀이 공연을 펼쳤다. 답례 공연이었다. 교실로 다시 돌아온 그는 아이들에게 책·필통·다이어리·미니 체온계 등이 들어 있는 선물더미를 하나씩 내밀었다. 그리고 나지막히 물었다. “오늘 음악회는 몇 점짜리일까?” 한 아이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백 점이요!” 하고 외쳤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아뇨, 천 점이에요.” “만 점이에요!” 하고 소리쳤다.

그가 말했다. “그 점수는 바로 여러분의 점수야. 오늘 좋은 음악회 갖게 해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못 만날 거야.” 몇몇 아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누군가 볼멘 소리로 “왜 못 오는 데요?” 하고 물었다. 그는 “이게 인생이란다”라고 간단히 대꾸해 주었다.
공연이 끝난 뒤 축구 선수가 꿈인 창현이(2년)는 소감을 묻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은 다빈이(6년)는 “정말 꿈만 같아요”라고 말했다. 흘리분교 성치운 교사는 “오늘 음악회는 도시 아이들도 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공연이었다. 아이들 가슴에 오래오래 기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그도 웃음을 거두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함께 온 다른 식구 4명과 함께 승합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작은 음악회’는 끝났지만 분교 아이들과의 만남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7월 말께, 횡성에서 2박3일 프로그램으로 두어 차례 작은 음악회를 열 예정이다. 그동안 와보고 싶어했던 분교 아이들과 선생님을 모실 계획이다.”(안내·www. yemin.org). 행사가 끝나면 그는 미국 시애틀에서 민족음악과 음악 인류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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